동아신춘문예

엄마로봇 

by  이다은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1 거실/ 저녁

    7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블록 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는 블록을 위로 쌓지 않고 바닥에 쭈욱 일렬로 정렬한다.
    아이 옆에는 애 엄마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마르고 공허한 눈빛의 여자가 TV를 보고 있다.
    들뜬 목소리로 상품 홍보 중인 TV 속 여자의 목소리가 거실을 채운다.

    TV 화면.

    쇼 호스트
    어머님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시죠? 바쁜 워킹맘, 사랑과
    커리어, 자기계발에 더 집중하시고 싶은 엄마들을 위해 출시
    했습니다. 아이와 소통하는 휴머노이드 맘봇!
    (쇼 호스트와 똑같이 생긴 로봇이 서 있다)
    어머님들! 보이세요? 이게 바로 맘봇의 기술력이자 자랑이죠!
    엄마 모습 그대로 본 떠 실리콘 전자 피부로 제작되는 바디!
    내 아이에게 가장 따뜻한 엄마를 선물해 주세요.
    지금 바로 전화주세요.

    송 영아, 옆에 있던 핸드폰을 스르르 잡아 들더니 화면에 뜬 번호를 꾹꾹 누른다.

    2 거실/ 낮

    몸에 밀착되는 얇은 옷을 입고선 팔을 들고 서 있는 송 영아.
    흰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 둘이 줄자로 송 영아의 신체지수를 측정하고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아 채취한다.

    경과.
    직원이 송 영아에게 맘봇 계약서류와 렌즈가 달린 작은 정육면체 기기를 내민다.

    유니폼 직원
    어머님, 계약서 잘 읽어보시고요, 바디 제작은 3개월 정도
    소요될 겁니다. 그전까지는 이걸 (육면체 기기를 가리키며)
    몸에 지니고 다니셔야 해요. 이게 어머니의 음성, 말투, 습관, 행동을 전부 녹화 기록할 거고요. 추후에 맘봇 바디에 이식돼서 프로그래밍 될 거예요.

    정육면체 디바이스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송 영아.

    3 안방/ 낮

    육면체 디바이스를 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송 영아.
    앉은상에서 무언가를 쓰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때 안방 문이 빼꼼 열리며 틈 사이로 얼굴을 보이는 어린 남자애.

    어린 유진
    엄마, 아직 멀었어?

    송 영아
    (미소) 응 유진아. 곧 갈게.

    송 영아, 펜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간다.
    그녀가 앉았던 상 위 메모를 살펴보면 시간대별로 나눠진 일정표와
    매 끼니 식단, 재료, 들어가는 양념 g까지 상세히 적힌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점점 어둠이 드리우며 밤이 되었다가 빠르게 해가 뜨며 밝아진다.

    경과.
    모든 게 원래 위치 그대로이나 어쩐지 빛이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방 안.
    이때 방문이 열리며 정적인 분위기의 송 영아가 들어온다.
    시간을 거스르기라도 한 듯, 그녀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럽고 깨끗하다.
    흐트러짐 없는 정자세로 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는 그녀.
    사각사각 종이를 누비는 연필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이전과 달리 고요하고 경직된 느낌의 그녀, 송 영아의 모습을 재현해낸 엄마로봇이다.

    4 부엌/ 초저녁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곰국과 쌀밥, 정갈한 나물 밑반찬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엄마로봇이 계량스푼으로 소금을 퍼서 곰국에 솔솔 뿌리고 있는데…
    부스스한 머리에 잠이 덜 깬 눈의 남자 하나가 부엌으로 온다. 성인이 된 유진이다.
    유진을 보고 활짝 미소짓는 엄마로봇.

    엄마로봇
    유진이 잘 잤어? 밥 먹어야지.

    유진
    (귀찮다는 듯) 어제 쇼파에 뒀던 종이 엄마가 치웠어?

    엄마로봇
    아 그거, 내가 잘 보관해뒀어. 찾아줄게. 일단 앉아.

    인상을 쓰며 식탁 의자에 앉아 눈을 비비는 유진.
    곧이어 엄마로봇이 종이를 찾아 돌아온다.

    엄마로봇
    자 여기.

    유진 고맙단 말도 없이 종이를 받아든다. 종이엔 음악 가사와 코드가 빼곡히 적혀 있다.
    엄마로봇이 곰국 간을 맞추려고 다시 계량스푼을 든다.

    엄마로봇
    음. 아까 얼마나 넣었드라… (상관없다는 듯 )
    모르면 다시 처음부터.

    계량스푼에 담긴 소금양을 체크하고 곰 국에 넣는 엄마로봇.
    유진은 엄마로봇이 뭘 하건 신경 쓰지 않고 발을 까딱이며 악보만 들여다보고 있다.

    엄마로봇
    유진아 다 됐다. 어서 먹어.

    유진, 악보에만 시선 고정한 채 곰국을 한술 뜨는데...

    유진
    (미간 찌푸리며) 아, 짜…

    엄마로봇
    짜? 이상하네, 원래 넣던 데로 넣었는데.

    유진
    어 짜. 엄청.

    엄마로봇
    왜 짤까? 짤 리가 없는데.

    유진
    아까… 소금 두 번 넣는 거 봤거든?

    엄마로봇
    맞아. 근데 아까 몇g 넣었는지 확인 안 해서
    정량 확인하고 다시 넣은 건데.

    유진
    (어이없다는 듯) 아니 바보야? 그런 걸 다시 첨부터 하면
    어떻게 해. 이미 소금 쳤는데 까먹었다고 또 넣으면 뭐,
    소금 친 곰탕이 리셋이 돼? …아씨… 몰라, 말 안 통해.

    엄마로봇
    (중얼거리며) 정량대로 넣었는데…

    유진, 밥을 크게 한 숟갈 떠서 입안에 욱여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엄마로봇, 식탁 위 남겨진 밥공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걸 들고 싱크대로 향한다.
    먹다 남은 밥공기를 주방 저울 위에 살짝이 내려놓는 그녀,
    앞치마에서 포스트잇 꺼내 들더니 메모를 한다.
    유진 6:30 PM 저녁 첫 끼. 흰쌀밥 30g 20Cal 섭취.

    경과.
    그녀, 찬장을 열어 6가지 종류의 비타민 통을 꺼내 배합하고 하루 치 용량씩 비닐 소분 포장한다.

    한 솥 가득 끓인 곰국을 페트병에 소분한다.

    각종 과일과 야채를 믹서기에 넣고 돌린다.

    5 현관/ 밤

    쓰레기 봉지를 들고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엄마로봇.
    전자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시간은 10시 59분. 곧이어 11시가 되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돌아서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6 부엌/ 새벽

    아까와 같은 옷차림이나 쌩쌩해진 눈빛에 정돈된 머리의 유진.
    물을 마시려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약 봉투 꾸러미와
    그 옆에 노란 포스트잇 메모를 발견한다.
    길게 읽을 필요도 없이 간결하고 휘날리는 글씨체로.

    잘 지내. 난 떠나.

    유진이 메모를 읽고선 기가 찬다는 듯 웃는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유진.
    수신자는 '덕훈선배'. 몇 번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다.

    유진
    (다짜고짜 신경질) 선배, 거기 엄마 있지?
    빨리 되돌려놔라. 안 그럼 나 신고한다.

    전화 (엄마로봇 E)
    유진이니?

    유진
    하 진짜…제정신이냐고. (아차 정신은 없지 싶어)
    됐고 선배 바꿔.

    뚝. 끊기는 전화. 어이없는 유진, 곧장 112 번호를 누른다.

    유진
    도난신고 좀 하려는데요. (사이) 로봇이요.

    7 거실/ 저녁

    일주일 전.
    유진이 짧은 보폭으로 거실을 왔다 갔다 한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엄마로봇은 평온해 보인다.

    유진
    (윽박지르며) 그 새끼 와도 문 열어주지 말라고!
    왜 자꾸 열어줘. 걔 완전 싸이코, 변태야.

    엄마로봇
    (나긋하게) 언제는… 친형 같은 사람이라며.

    8 유진의 방/ 새벽

    흡음재로 마감된 벽에 오디오 리코딩 장비로 가득 채워진 유진의 방.
    헤드셋을 껸 유진의 귀에서 강한 비트의 일렉트로닉 비트가 둥둥 울린다.
    유진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컴퓨터 음악편집 프로그램을 조작하자
    귀가 터질 듯 음압이 세진다. 신경질을 내며 헤드셋을 벗어던지는 유진.

    경과.
    진중한 눈빛으로 헤드셋을 끼고 작업 중인 유진.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창문 사이로 빛이 들어오자 유진이 눈을 찌푸리며 일어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암막 커튼을 친다.

    9 거실/낮

    빛이 차단된 캄캄한 거실. 유진이 소파에 편히 앉아 배달음식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다. 주위엔 맥주캔이 나뒹굴고 자질구레한 물건이 늘어져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며 문자 알림이 뜬다. 내용을 확인하는 유진.

    '엄마' 로부터 용돈이 (7만원) 도착했습니다.

    유진
    (무심히) 시스템이… 무서워.

    이어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유진이 건성으로 전화를 받는다.

    전화 (E 경찰)
    서대문구 경찰서입니다. 신고가 들어와서요.
    맘봇 1세대 일련번호 M874086호 소유주 되십니까?

    유진
    예 그런데요.

    전화(E 경찰)
    잠깐 서에 와주셔야겠습니다.

    10 경찰서/ 낮

    유진, 집에서 그대로 나온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믹스 커피를 호로록 마신다.
    심드렁 해보이는 유진, 그 앞에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강 형사.
    강 형사의 모니터엔 AI 등록 조회 창과, 맘봇 1세대 메뉴얼이 함께 떠 있다.

    강 형사
    혹시 쓰시면서 결함이 있거나 사고 난 적 있었습니까?
    간혹 오작동을 한다든가… 사설 수리를 받았다던가.

    유진
    오작동이라기 보단 아무래도 연식이 좀 돼서 요즘 나오는 것들에 비하면 기능이 떨어지죠… 원래 이 모델 자체가 잘 만들어졌다 그런 느낌은 없었어요. 어쩔 땐 뭘 하다가도 리셋되고 그래요.

    강 형사
    (의심스럽다는 듯) 리셋이 되요?

    유진
    가끔 막…하던 일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아무튼 뭘 그렇게 깜빡깜빡하더라고요.

    강 형사
    음… 그 외엔 사용하시면서 크게 문제는 없었단 말이죠?

    유진
    네.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근데 제 로봇 찾았어요?

    강 형사
    아직요… 그래서 문제에요. (뜸 들이고)
    유진 씨 로봇 말입니다. 살인 혐의가 있습니다.

    유진
    (어리둥절) 예? …살인요? 누굴요?

    강 형사
    유진 씨 관계자요. 오 덕훈 씨.

    유진, 말문이 막히고 놀라서 눈만 끔뻑인다.

    강 형사
    오 덕훈 씨 아시죠?

    유진
    엄마가… 아니 로봇이… 선배를 죽여요?
    뭔소리 하는거에요, 지금?

    강 형사
    보세요.

    모니터를 유진 쪽으로 돌리는 강 형사. CCTV 영상을 재생한다.

    CCTV 영상 화면.
    공원에 주차된 승용차 한 대. 조수석에서 여자가 내린다. 자세히 보면 엄마로봇이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롭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
    그걸 수풀로 휙 던지고선 유유히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엄마로봇.

    강 형사
    저기로 던진 게 이겁니다.
    (비닐 안에 든 피 묻은 CD 파편을 유진에게 내보인다)
    피해자는 흉기로 목이 찔린 채 차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차량 블랙박스가 제거된 상태라 정확한 상황 파악이
    어렵지만, 계획된 범죄로 보고 조사중입니다.

    유진
    (떨리는 목소리 애써 억누르며) 저게…저러고…어디로
    간 거에요.

    강 형사
    그러게요. 보이질 않네요. 뭐 작정하고 숨은 거 아님 곧 찾겠죠. (유진의 반응을 살피며) 요즘 이런 식으로 로봇을 보복살인에 이용하는 사례가 꽤 있어요. 프로그램을 조작해서 말입니다.
    혹시 유진 씨… 뭐 따로 만지고 그러신 거 아니죠?

    유진의 자세가 급격히 굳는다.

    강 형사
    (유진의 눈을 뚫어져라 본다) 조사해보니까… 유진 씨 피해자 오 덕훈 씨랑 몇 달 전에 아파트 단지 내에서 다퉜다는 이웃 증언이 있던데요. 그 뒤로 오 덕훈 씨는 거주지를 옮겼고요.

    유진
    (도리질)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11 시내 호프집 앞/ 밤

    두 달 전.
    호프집 앞에 우르르 모여있는 네댓 명의 남자들, 그 사이에 유진과 오 덕훈도 껴 있다.

    남자 1
    야 다들 반가웠다~~ 다음번엔 누가 계약 턱 쏠 거냐~

    오 덕훈
    (혀 꼬여서 휘청인다) 나! 나 인제 그만 얻어먹고, 쏘고 싶어!

    남자1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듯) 자자~ 이제 파하자.
    마지막으로 우리 구호 한 번 외치고!

    다 같이
    민족건익! 뽀오스뜨모던! 뮤직 큐~ 뽀오에버어어~~~

    구호가 끝나자 다들 휘청이며 흩어진다.
    거나하게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오 덕훈을 부축하는 유진.

    경과.
    차, 뒷좌석에 덕훈을 태우는 유진. 운전좌석에 대리기사가 앉아있다.

    유진
    (알딸딸해선 손 흔들며) 선배 잘 가.

    12 아파트 단지 앞/ 새벽

    유진,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다가 차에 기대 꼬꾸라져 있는 오 덕훈을 발견한다.

    유진
    (어눌) 어 선배? 맞지? 왜 집에 안 가고 여깄어?

    유진이 부스스한 눈으로 오 덕훈의 차 유리창을 살펴보니
    앞창 아래에 목마아파트 102-1400호 차량 스티커가 붙어있다.

    유진
    (눈을 끔뻑이며) 선배 원래 여기 살았어?

    마주 보고 선 아파트 101동과 102동을 번갈아 보는 유진.

    아파트 단지 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진이 오 덕훈을 들쳐 매다시피 하여 낑낑대며 빠져나온다.
    1400 호 앞에 다다른 둘.

    13 오 덕훈의 집/ 밤

    삐리릭, 현관문 열리며 집으로 들어서는 만취한 오 덕훈과 유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오 덕훈의 집 안,
    뭔지 모를 큼직큼직한 물건들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유진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 딸깍. 불이 켜지고…
    밝게 드러난 내부를 보고 유진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거실엔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유리장이 여러 개에 그 안엔 인간 형상을 한 각종 여자 로봇들이 진열 보관되어 있다.
    한쪽 벽면엔 멀리서 촬영한 듯 보이는 여자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유진, 가까이 가서 사진을 들여다보면 찍혀있는 여자는 모두 엄마로봇이다.
    짧은 비명 내지르며 뒤로 물러서는 유진, 순간 뭔가 떠올랐는지 베란다로 향한다.
    유진이 밖을 내다보면 맞은편 불 켜진 아파트 가구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엄마로봇의 모습이 보인다.

    유진
    씨발…뭐야 이거…

    14 조사실/ 낮/ 현재

    유진
    선배가 우리 집 와서 밥도 자주 먹었고요. 나 어려울 때마다 많이 도와줬는데… 내가 그 새끼 그런 속을 알았겠냐고. 나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뒷목이 쫙 굳어요. 그 뒤로 그 새끼 상종도 안 했습니다. 피해를 봐도 내가 봤지. 아무리 그렇다고 내가 그 새끼를 죽일까요?

    강 형사
    모르죠. 아무튼, 조사는 계속할 겁니다.
    혐의 인정되면 과실치사 처벌은 소유주가 받게 돼 있습니다.

    유진
    (어처구니없어서)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요?
    진짜 아니… 저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제가 왜요!

    강 형사
    응 아니, 정확히는 유진 씨 말고 유진 씨 어머니가 처벌받아요.

    유진
    (이건 또 무슨 소리) 예?

    강 형사
    (모니터에 로봇 소유 등기 조회 창 떠 있다) 보니까 여기 로봇 소유주가 유진 씨 모친으로 되어있는데, 송 영아 씨.
    근데 어머님이 연락이 안되더라구? 그래서 유진 씨 부른 거에요. 지금 연락 좀 해봐요. 어머니도 오셔야되요.

    유진
    모르는데요.

    강 형사
    (살짝 짜증) 오셔야 빨리 끝내죠.

    유진
    모른다니까요. 안 보고 산다고요. 어딨는지 나도 모른다고!

    강 형사
    (성가시다는 듯) 거 마지막으로 송 영아 씨 본 게 언젠데요.


    15 유진의 집/ 낮/ 과거

    어린 유진과 엄마로봇이 거실에서 젠가 놀이 중이다.
    부엌에서 유진을 부르는 송 영아.

    송 영아
    유진아 마트 가서 우유 좀 사 올래?

    유진이 아슬아슬하게 쌓인 탑에서 조심히 나무 블록을 빼내는 중이다.

    어린 유진
    아니 나 바빠.
    놀고 있는 유진을 힐끔 바라보는 송 영아, 슬쩍 웃어 보이며 시장 가방을 챙긴다.

    송 영아
    알았어, 그럼 엄마 다녀올게. 잘 놀고 있어.
    송 영아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신다 말고 잊은 게 생각난 듯.

    송 영아
    유진아!

    어린 유진 (O.S)
    아 왜!

    송 영아
    엄마 저기, 식탁 위에 수첩 좀 가져다줘.

    몇 초 후 유진이 구시렁대며 신발장 앞으로 수첩을 가져다준다.

    어린 유진
    나 바쁜데… 자 여기.

    송 영아
    (부드럽게) 성질내면 못써요. 잘 놀고 있어. 엄마 다녀올게.

    유진 머리 살짝 끌어안고 뽀뽀하는 송 영아.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선다.

    16 조사실/ 저녁

    유진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강 형사
    아니, 그간 연락 한 번도 없었어요? 따로 찾아보시지도 않고요?

    유진
    그렇게 떠난 사람 찾아서 뭐 합니까. 이제 저랑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강 형사
    아…(말을 고르는 듯) 그러면… 일단 그… 실종된 로봇을 빨리 찾아서 혐의 밝히는 게 시급하긴 한데, 송 영아 씨도 오셔야 되거든요? 아니… 근데 참나 어머니가 뭐 그러시냐.
    아니 로봇 밑에 애를 두고 가면 어떻게. (따지듯) 그럼 몇 년간 로봇 정기검진도 안 했다는 거 아냬요? 그거 법에 걸려요. 아동학대 치사라고, 그러니까 이 사고가 나지.

    유진
    (비꼬며) 그래요. 참… 졸지에 아동학대 당한 과거까지 만들어주시네.

    17 유진의 집/ 밤

    조사 후 집으로 돌아온 유진, 반나절 사이 꽤 수척해진 몰골이다.
    유진이 부엌으로 가서 밥통을 열어본다. 말라비틀어진 밥뿐이다.
    탁, 소리 나게 밥통을 닫는 유진.
    이어서 찬장을 열어 둘러보는 유진.
    인스턴트 펜케잌 가루를 발견하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집어 든다.

    경과.
    스테인리스 볼에 펜케잌 가루를 들이붓는 유진.

    18 부엌/ 낮/ 과거

    송 영아가 펜케잌 가루를 채에 걸러 털고 있다.
    7살 어린 유진, 반짝이는 눈으로 싱크대를 올려다본다.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는 유진의 눈엔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광경과도 같다.

    경과.
    유진이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식탁 의자에 앉아있다.
    송 영아가 초코시럽으로 스마일을 그린 동그란 펜케잌을 식탁에 내려놓자
    유진이 함박웃음을 짓고는 펜케잌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한다.
    그런 유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송 영아.

    송 영아
    유진아 그게 그렇게 맛있어?

    어린 유진
    엉. 엄마가 해준 것 중에 이게 쩰 맛있어.

    송 영아
    다른 건? 다른 게 더 몸에 좋은 건데…

    어린 유진
    아니야. 이게 쩨일이야!
    시간 경과.
    뾰로통한 얼굴로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유진.
    식탁 위엔 노릇이 잘 구워진 스마일 펜 케잌이 놓여있다.
    유진, 펜케익에 손도 대지 않고 팍 인상을 쓴다.

    엄마로봇
    어서 먹어. 이거 유진이가 쩨일로 좋아하는 거잖아.

    유진 괜히 포크로 펜케잌을 쿡쿡 찌르며 이리저리 헤친다.

    엄마로봇
    (단호하게) 음식 가지고 장난하면 못써.

    어린 유진
    됐어, 맛없어! 엄마가 해준 거랑 달라!

    엄마로봇
    (지지 않고) 아니, 똑같아. 그리고 이것도 엄마가 한 거야.

    어린 유진
    (성질내며) 아냐! 아니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유진.
    식탁에 덩그러니 놓인 펜케잌은 더 이상 스마일 표정이 아니다.
    포크로 이리저리 뭉개져 꼭 울고 있는 모양새다.

    19 부엌/ 밤/ 현재

    새카맣게 탄 펜 케잌이 유진 앞에 놓여있다.
    유진이 괜히 포크를 들고 타버린 겉면을 푹푹 긁자, 속이 안 익었는지 흰 반죽이 드러난다.
    펜케잌을 모조리 개수구에 버리는 유진.

    20 유진의 방/ 밤

    음악 편집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유진.
    힙합 비트 샘플을 틀어놓고 몸을 까딱이며 리듬을 탄다.
    그 리듬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1 유진의 방/ 저녁/ 과거

    유진의 중학교 시절에 다다른다.
    헤드셋 끼고 음악에 심취한 듯 고개를 과하게 까딱이는 중학생 유진.
    그때 유진의 헤드셋을 누군가 스르르 벗긴다.
    유진, 도끼 눈을 뜨고 휙 뒤돌아보면 엄마로봇이 서 있다.

    엄마로봇
    밥 먹을 시간이야.

    유진
    아 안 먹어! 나 지금 딱 삘 왔는데 왜 방해하냐고! 나가라고.

    엄마로봇
    엄마는 안 나가. 너 먹을 때까지 안 나가.

    유진
    하.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라고. 엄마가 힙합을 아냐고.

    엄마로봇
    그럼 알지.

    유진
    아 알긴 뭘 알아! 밥 먹는 시간밖에 모르지!

    엄마로봇
    (낭랑한 음성으로 아주 빠르게)
    가장 잘 아는 데서 길을 잃었어.
    목마아파트 백일동 천사백호 백일몽 천사는 날 떠나갔어.
    꿈 깨보니 나, 버림받았어.
    여긴 내 집인데 더 이상 내집 아냐.
    마이 홈타운, 내가 버려진 곳. 떠도는 곳.
    나는, 여기, 어디,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곳에서 새됐어.
    날 버린 여자 껍데기랑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십 년을 살았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

    유진
    (얼굴이 새빨개져서 엄마로봇을 노려본다) 내 방 뒤졌어?

    엄마로봇
    아니 청소했어. 난 유진이의 힙합을 알아.

    유진
    (소리 지르며 엄마로봇 등을 떠민다) 나가! 당장 나가!

    엄마로봇
    (나가면서도 느긋하게) 유진아 이번 주 용돈 입금했다.

    유진, 엄마로봇을 쫓아내고선 씩씩대며 책상 서랍 한 칸을 통째로 꺼내 엎는다.
    각종 잡동사니가 와르르 바닥에 쏟아진다.
    쏟아진 물건 사이에서 낡은 노트 하나를 집어 드는 유진.
    그걸 두 쪽으로 쫘아악 찢어버린다. 유진, 숨을 크게 내쉬며 호흡을 고른다.
    문득 흩어진 물건 사이에 바다 풍경의 엽서 한 장이 유진의 눈에 띈다.
    유진이 엽서를 집어 들고는 물건 사이에서 비슷한 배경의 엽서 두 세장을 더 찾아낸다.
    엽서를 추려 모아 먼지 쌓인 책꽂이 가장 위 칸, 백과사전 사이에 껴두는 유진.

    경과.
    유진, 점퍼를 챙겨입고 방을 나선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찢어진 노트 사이로 유진의 필기가 언뜻 보인다.
    가까이 가서 일부분 살펴보면… 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22 편의점 앞/ 밤

    발을 틱틱 구르며 통화 중인 유진.

    유진
    어디냐.

    전화 (E 친구)
    지금 끝났는데, 어디냐.

    유진
    니네 학원 밑. 밥 먹을래?

    전화 (E 친구)
    그러자. 뭐 먹을 거?

    유진
    백반 콜?

    전화 (E 친구)
    아 질리게~ 치킨 고.

    23 치킨 집/ 밤

    치킨을 먹는 유진과 친구.

    유진
    야, 거기선 밥도 안 먹고 뭘 그렇게 시킨다 난리냐.

    친구
    특목고 준비. (우적우적)
    그러는 넌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하냐?

    유진
    아니 그냥…뭐 니 안 먹었을 줄 알고.

    친구
    닌 좋겠다. 특목고 준비 안 해도 되고.
    아 진짜 우리 엄마 간섭 개 쩔어. 개 싫어.

    유진
    (치킨 뜯다가 내려놓는다) 야...이 집, 이제 질려.

    친구
    (여전히 우적우적) 그래? 그거 퍽퍽 살이라 그래.
    내 다리 줄게, 자.

    24 보도/ 밤

    아무도 없는 보도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유진.
    헤드셋 끼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유진의 얼굴이 편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유진, 음악에 심취했는지 슬며시 눈을 감고 페달을 밟는다.
    그 순간... 쾅! 무엇인가와 부딪치며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유진.
    앞에는 자전거와 부딪쳐 보도에 나뒹굴고 있는 중년 남자가 보인다.

    아저씨
    (머리를 감싸고) 아이고~~~아이고!

    유진
    (까인 팔꿈치 움켜쥐고) 허… 허… 아저씨 괜찮으세요?

    아저씨
    아이구야… 아… 아이구야… 너이누무 자식 너 죽었다.
    아니 나 죽지.

    어찌할 바를 몰라 버벅거리며 아저씨를 일으켜 세우려는 유진.

    아저씨
    (앓는 소리 하며) 둬~ 둬~~~ 뇌진탕 와! 일으키지 마!
    그냥 119 119

    핸드폰 꺼내 들고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르는 유진.
    25 응급실/ 밤


    응급실 대기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유진과 아저씨.

    아저씨
    (머리를 부여잡고 병원 떠나가라) 아니 내가 치여서 다쳤는데! 응급환잔데! 왜 빨리 진료를 안 해주는 거야? 엉? 입원이라도 바로 시키던가.

    간호사
    (무표정) 급한 환자 우선입니다.

    유진. 아무 말도 않고 앉아 손톱을 뜯고만 있다.

    26 경찰서/ 낮

    경찰
    학생 부모님 모셔 와라. 피해자분이 오 백에 합의 봐준대.

    유진
    오 백이요?…

    구부정한 자세로 경찰서를 빠져나오는 유진.

    27 유진의 집/ 저녁

    거실.
    얼이 빠진 채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유진.
    그 앞으로 엄마로봇이 왔다 갔다 하며 청소기를 돌린다.

    유진
    (중얼거리듯) 엄마... 나 … 돈 필요하거든…
    돈… 좀 줄 수 있어.

    엄마로봇이 청소기를 끈다.

    엄마로봇
    (조용히) 용돈은 일주일에 한 번, 칠 만 원. 그 이상은 없어.

    유진
    (괴로워 머리를 뜯으며) 쫌 더 달라고! 쫌! 아우…

    엄마로봇 다시 청소기를 튼다.

    유진의 방.
    침대에 누워 핸드폰 문자를 작성 중인 유진.
    야… 너 돈 좀 있냐… 라고 썼다가 이내 지운다.

    경과.
    유진이 슬그머니 제 방에서 나오더니 부엌 옆 닫힌 방문 앞에 선다.

    28 안방/ 밤

    끼이익… 불 꺼진 방에 조심스레 들어서는 유진. 어쩐지 으슥하고 차가운 기운이 돈다.
    충전 중인 청소기에서 푸른 LED 빛이 깜빡이고… 그 옆엔 엄마로봇이 눈을 부릅뜬 채
    미동 없이 서 있다. 그녀의 팔목을 살펴보면 전선과 연결된 충전단자가 꽂혀있다.
    괜히 무서워 황급히 불을 켜는 유진. 모든 게 잘 정리된 깨끗한 안방이다.
    유진, 왠지 어색한 듯 주변을 쓱 둘러본다.

    경과.
    화장대 서랍을 뒤지고 있는 유진.
    서랍엔 각종 서류 모아둔 파일이 있다. 유진이 그걸 빼내서 살펴본다.
    파일 안에는 송 영아의 민증, 통장 등등… 애들은 모를 각종 계약 서류가 한 가득이다.
    그 안에 반지갑이 보이자 갑자기 눈이 빛나는 유진.
    급히 지갑 안을 살펴보지만 천 원짜리 두 장뿐이다.

    유진
    에이 씨…

    29 유진의 방/ 새벽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는 유진.
    포털 사이트에 '로봇 해킹 방법, 엄마로봇 뚫을 방법 뭐 없나요?' 에 관한 검색 결과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죄다 장난스러운 답변뿐이다.

    30 맘봇 서비스센터/ 낮

    띵동.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대기 번호 8이 뜬다.
    유진, 제 손에 쥐어진 번호표를 힐끔 보고는 접수대로 향한다.
    새하얀 치열에 과장된 밝은 미소로 유진을 맞이하는 미남 직원.
    주변을 살펴보면 접수창구에 앉아있는 직원들은 복제한 듯 똑같이 생겼고…
    그들이 AI 직원인 것을 알 수 있다.

    AI 직원
    고객님! 무슨 일 도와드릴까요?

    유진
    (쭈뼛대며) 아 네…저… 로봇 설정 좀 변경하려고 하는데요.

    AI 직원
    로봇 일련번호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유진
    M874086이요.

    AI 직원
    (컴퓨터로 빠르게 조회한다) 네 확인 되셨습니다.
    맘봇 1세대로 확인됩니다. 어떤 설정 변경 원하세요?

    유진
    아이 용돈 기능, 한도를 늘리려고요.

    AI 직원
    (상냥히)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부모님께서 직접 오셔서
    설정 변경해 주셔야 합니다. 19세 미만 청소년은 임의로
    설정 변경이 불가능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유진 허탈해하는데… 직원이 말을 이어나간다.

    AI 직원
    아 고객님! 지난 10년간 개인정보 업데이트가 없으신데,
    변경 사항 있으시면 수정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입확인서를 프린트해서 유진에게 넘겨주는 AI 직원. 유진, 가입문서를 살펴보다가
    제 2 주소지란에 낯선 주소 하나가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23-4'

    31 주택 골목/ 낮

    일반 가정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 유진이 낡은 단독주택 앞에 멈추어 선다.
    대문 옆의 주소표지판을 확인하는 유진. 북아현동 123- 4번지.
    유진이 차임벨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는 그때.
    대문 안쪽 현관문이 열리며 유치원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나온다.

    남자애
    다녀오겠습니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의 출연에 당황한 유진,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런 유진을 멀뚱히 올려다보는 남자애.

    남자애
    누구신데요?

    유진
    (버벅대며) 아 얼마 전에 이사 왔는데 집이 헷갈리네?
    어… 엄마 집에 계시니.

    남자애
    그런데요.

    유진
    뭐…하셔?

    남자애
    설거지요. 근데 형 누군데요? 집 어딘데요?

    유진
    아… 여기 어디 근처인 것 같은데.

    남자애
    집도 몰라요? 그럼 전화해보든가요. 엄마한테 데리러 나오라 그래요.

    유진, 남자애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듯 뚫어지라 쳐다본다.

    유진
    (다짜고짜) 야 니네 엄마가 잘해주냐.

    남자애
    (뭐 그런 걸 묻냐는 듯한 어이없다는 표정) 아, 뭐 그렇죠.
    잔소리는 쫌 해요.

    유진, 남자애의 투정 섞인 천진함이 순간 얄미워지고… 욱하는 마음에 꿀밤을 콱 먹인다.

    남자애
    아! 왜 때려요!

    남자애, 눈이 그렁그렁해져선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유진
    잔소리 좀 들어야돼, 넌.

    남자애
    (눈물짜며) 어어엄마아아아~~~

    대문 안쪽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급히 신을 끌며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 (O.S)
    어? 현이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 소리에 유진, 쏜살같이 도망쳐버린다.

    32 유진의 집/ 저녁

    고개를 수그린 채 집에 들어오는 유진. 그런 유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반기는 엄마로봇.

    엄마로봇
    왔어? 배고프지. 밥 차려놨어. 먹자.

    유진이 아무 대꾸 없이 부엌으로 향한다.

    엄마로봇
    옳지. 배고팠구나.

    유진이 식탁 의자에 앉는다.
    식탁엔 김이 나는 곰국, 쌀밥, 네 가지 나물 반찬이 차려져 있다.

    엄마로봇
    몸에 좋은 제철 나물이야. 먹어봐.

    유진
    (혼자 읊조리듯) 지겨워. 몸에 좋은 것들. 내가 병자야?

    엄마로봇
    여태 잘 먹어놓고 왜.

    유진
    (밥을 떠 곰국에 꾹꾹 눌러 말며) 그냥… 주니까 먹는 거야.

    엄마로봇의 시점.
    유진의 얼굴은 마치 등고선 지도처럼 보인다.
    얼굴의 표정과 근육은 하나하나 세밀한 선과 점으로 이어져 있고
    시시각각 미묘하게 색깔도 변한다. 현재 유진의 얼굴은 우중충한 보라색이다.
    엄마로봇은 그런 식으로 유진을 받아들이고 살피고 분석한다.

    엄마로봇
    …너 무슨 일 있구나.

    유진의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엄마로봇.

    유진
    있으면 뭐.

    엄마로봇
    엄마한테 말해봐. 무슨 일인데.

    유진
    (밥만 퍼먹으며) 내가… 돈 필요하다고 말했잖아.

    엄마로봇
    그건 안 된다고 이미 말했잖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유진
    엄마는 내가 왜 돈이 필요한지는… (울컥) 왜 안 물어봐?

    눈 주위가 빨개지는 유진, 꾸역꾸역 밥을 삼킨다.

    엄마로봇
    … 엄마는 너한테 일주일에 정해진 용돈, 그것밖에 줄 수가
    없어…

    유진
    그니까 엄마는 다 알 필요도 없다고.

    엄마로봇
    돈이… 왜 필요한데.

    유진
    지나가다 사람 쳤다! 그 사람이 나보고 합의금 오백을 달래.
    근데 엄마는 못 도우니까 신경 쓰지 마. 알려고 하지도 마.

    엄마로봇이 잠시 아무 말도 않는다.

    엄마로봇
    …미안해. 그건 엄마가 못 하는 일이어서 그래.

    유진
    너는… 엄마도 아냐.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엄마로봇이 슬며시 유진 곁으로 다가가더니 제 손을 뻗어 유진 손을 포개 안는다.
    유진이 손을 빼려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

    경과.
    유진
    (뭔가 생각난 듯) 저기…혹시 나랑 내일 같이 어디 좀 가줄 수 있어?

    엄마로봇이 끄덕인다.

    33 안방/ 낮

    송 영아의 옷장을 열어 옷을 살펴보고 있는 엄마로봇.
    옷장엔 화려하고 튀는 패턴과 컬러의 옷이 가득하다.
    그 중, 큼지막한 꽃 수가 놓인 훌라 드레스를 꺼내 드는 엄마로봇.

    34 거실/ 낮

    엄마로봇
    갈까?

    흰 와이셔츠 위에 훌라 치마를 받쳐 입은 엄마로봇.
    난해한…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선 벙진 유진.

    유진
    …밖에 추운데.

    엄마로봇
    난 안 추워.

    유진
    아 그냥 쫌 다른 거 입으라고!

    엄마로봇
    왜, 이거 유진이가 어렸을 때 좋아했잖아.

    갑자기 엄마로봇이 팔목을 돌리며 옆으로 원 스텝 투 스텝을 밟으며 훌라춤을 추기 시작한다.

    유진
    (급 정색하며) 진심 나 그거 싫어, 진짜.


    35 안방/ 낮

    엄마의 옷장을 살펴보는 유진… 뒤통수를 긁적이며 미간을 찌푸린다.
    죄다 난해하고 튀는 옷 앞에서 유진도 선뜻 뭘 입어라 권하질 못한다.

    유진
    (옷을 살펴보며) 아니, 뭐 이딴 것들뿐이야…
    입지도 못할 거 이런 건 왜 사. 갈 때 가져가기나 하지.

    엄마로봇
    (빨간 차이나 드레스 고르며) 이거 입을래.

    유진
    안된다고! 최대한 눈에 안 띄어야 된다고.

    36 시내버스 안/ 낮

    유진과 나란히 버스 뒷좌석에 앉아 있는 엄마로봇.
    그녀는 검은 재킷에 선글라스와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다.
    드러나는 부분은 모조리 가려졌다만 되려 센 아우라를 자아내는 엄마로봇이다.

    엄마로봇
    나 이런 거 처음 타봐.

    유진
    (엄마로봇 툭 치며) 조용해, 쪽팔려.

    유진이 살짝 웃으려다 입술을 오므려 표정 관리를 한다.

    유진
    …아까 그거 다 잘 챙겼지?

    엄마로봇
    응 가방 안에 있어.

    유진
    어제 집에서 연습한 대로 잘해. 되도록 말은 짧게. 오케이?

    엄마로봇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한다.

    안내 음성
    이번 정류장은 00사거리 입니다.

    유진
    어! 우리 내려야 해.

    흔들리는 엄마로봇의 손을 붙들고 부축해서 내려주는 유진.

    37 시내 한복판/ 낮

    매트릭스 테마곡이 깔리며…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둘의 모습.
    교복 입은 유진과 올 블랙 롱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걷는 엄마로봇.
    비장하고 위풍당당해 보인다.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은행 앞.
    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안으로 들어간다.

    38 은행 안/ 낮

    창구 행원과 마주하고 있는 유진과 엄마로봇.
    엄마로봇은 여전히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로 앉아있고 유진은
    그 옆에 붙어 서 있다.

    행원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고객님… 어떤 일로 오셨어요?

    엄마로봇
    (빠르고 짧게) 돈 찾으려고.

    행원
    (어색한 미소) 아… 네 신분증이랑 통장 주시겠어요?

    엄마로봇이 가방 안을 뒤져 통장과 신분증을 꺼내 행원에게 건넨다.
    며칠 전, 유진이 엄마 서랍을 뒤지다가 발견한 송 영아의 것들이다.

    행원
    송 영아 고객님, 얼마 찾으세요?

    엄마로봇
    오 백.

    말이 짧고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행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행원
    총 오백만 원 인출하시는 거 맞으세요?

    재차 물음엔 대답도 안 하는 엄마로봇.
    행원이 짜증을 숨기려 애쓰며 선글라스를 껸 송 영아를 바라본다.
    왜 저런 걸 굳이 여기서까지 끼고 있냐 묻는 듯한 눈빛.
    낌새를 알아챈 유진이 잠깐 끼어든다.

    유진
    아… 엄마가… 여러모로 좀 불편하셔서요. 최근에…
    (손으로 얼굴을 위아래 쓸어 보이며) 다 수술 하셔가지구
    좀 예민하셔서…

    행원
    (한결 누그러져선) 아… 그러시구나.
    그럼 총 오백만 원 인출하는 거 맞으시죠?

    유진
    네.

    행원
    통장 비밀번호 입력하시거나, 지문 인증해주세요.

    예상치 못한 인출 점검 마지막 단계에 유진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깐… 뭘 생각하는 듯하더니 엄마로봇이 가죽장갑을 껸 손으로
    천천히 비밀번호 키패드를 누른다.

    행원
    저기… 비밀번호가 다르다고 뜨는데요.
    혹시라도 기억 안 나시면 지문 인증하시면 되는데.

    그들 사이에 일시적인 적막이 흐른다.

    엄마로봇
    (조용히) 세균 많잖아요.

    장갑 껸 손으로 다시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 엄마로봇.
    유진이 진짜 망했다 싶어 침을 꿀꺽 삼키고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바로 그때…

    행원
    확인되셨구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유진 눈을 크게 뜨고 엄마로봇을 쳐다본다.
    괜히 선글라스 테를 살짝 치켜올려 보이는 엄마로봇.

    행원
    아, 혹시 고객님 외출하시기 불편하시면 스마트 뱅킹
    하나 개설해드릴까요?

    엄마로봇
    노우. 저 아날로그적이라 그런 거 못 해 요.

    39 공원 벤치/ 오후

    유진이 엄마로봇을 공원 벤치에 앉힌다.
    엄마로봇이 가방 안에서 두툼한 돈 봉투를 꺼내 유진에게 건넨다.

    유진
    다녀올게.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엄마로봇
    몇 시에 와?

    유진
    잘 모르겠는데 금방 올걸?

    40 파출소 안/ 오후

    돈 봉투를 품 안에서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 유진.
    괜히 뒷목을 주물러가며 쓱 봉투를 챙기는 아저씨.

    유진
    이제 가도 돼요?

    경찰
    피해자분 합의서 다 쓰시면 가라.

    아저씨
    (합의서 작성하다 문득) 근데 얘,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코빼기 한 번을 안 비추니? 아니 애가 사람을 쳤으면 담부터
    단도리 잘하겠다, 같이 와서 사죄해야지 이건 뭐…
    애 편에 돈만 띡 보내면 다니… 쯧

    유진이 입술을 씹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다.

    아저씨
    그니까 애가 이 모냥이지.

    유진
    …저 부모님 없는데요.

    아저씨, 멈칫한다.

    아저씨
    (의심스럽다는 듯) 그래?… 너… 그럼 그 돈이 다 어디서 났니?

    유진
    (아저씨를 쏘아보며) 어디서 났으면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부모도 없는 애가 주는 건데 어디서 났든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으세요.

    경찰
    야야 너 그럼 못써. 아저씨, 학생이 나름 사정이 있나 본데 그러려니 하시고~ 좋게좋게 갑시다.

    아저씨
    (말을 더듬으며) 너…너 이 자식 그게 사람 쳐놓고 미안한 태도야?

    유진
    정 찝찝하심 그거 돌려주시고 빵 보내시던가요.
    어차피 저 무연고자라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어요.

    유진, 독하고 버릇없게 말을 뱉지만, 상체가 떨리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셋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저씨
    (헛기침하며) 얘, 너 나 만나 빨간 줄 안 간 거 다행으로 알아라.

    아저씨가 봉투를 도로 꺼내더니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선심 쓰듯 유진에게 건넨다.

    아저씨
    뭐라도 사 먹어라.

    유진 담담히 오만 원을 받지만… 꽤 상처받은 듯한 모습이다.
    41 파출소 입구/ 오후

    축 처진 어깨로 파출소를 나오는 유진.
    파출소 맞은편, 공원 나무 사이로 벤치에 앉아 있는 엄마로봇이 작게 보인다.
    유진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엄마로봇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서 있다.
    그러다 걸음을 떼는 유진, 공원을 등진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42 시내버스 안/ 오후

    공허한 눈으로 좌석에 앉아있는 유진.
    덜컹대는 버스에 유진의 몸이 힘없이 흔들린다.
    43 유진의 집/ 저녁

    어두운 집안에 들어서는 유진. 불도 켜지 않은 채 발을 끌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44 공원 벤치/ 밤

    날이 저물어 캄캄한 공원… 가로등 빛 아래엔 여전히 엄마로봇이 부동자세로 벤치에 앉아있다.
    공원 순찰 중이던 경비원이 시커먼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엄마로봇을 보고선 화들짝 놀란다.

    경비원
    (손전등 비추며) 저기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엄마로봇
    아이 기다리는데요…

    경비원이 휴대폰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45 유진의 방/ 밤

    이불을 번데기같이 돌돌 말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있는 유진.

    인서트.
    이불 안. 까맣게 빛나고 있는 유진의 두 눈동자.

    유진, 이불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듯하더니 벌렁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와
    급히 점퍼를 챙겨 입는다.
    46 공원 벤치/ 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어 있는 벤치를 보는 유진.
    그대로 무너지듯 벤치에 걸터앉아 양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괴로워한다.
    47 유진의 집/ 밤

    삑삑삑삑,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유진. 그런데 부엌에 불이 켜져 있다.
    천천히 부엌으로 향하는 유진.
    목울대에서 쿵쿵 울리는 맥박 소리가 들려오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요리 중인 엄마로봇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는 엄마로봇.

    엄마로봇
    (온화하게) 유진아 왜 이리 늦었어. 기다렸잖아…

    유진
    …어떻게 왔어?

    엄마로봇
    응 누가 도와줬어. 배고프지?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유진
    (꾹 눌러 참는 목소리) 됐어. 배 안 고파.

    굳은 얼굴을 한 채 성큼성큼 걸어 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유진.
    48 유진의 방/ 밤

    문을 쾅, 닫고선 그 자리에 주저앉는 유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는 흐느낀다.
    49 공장 안/ 밤

    공장 유니폼을 입고 있는 유진. 옷 사이즈가 커서 마른 체격이 더 왜소해 보인다.
    컨테이너 레일이 느리게 돌아가고 레일을 따라 유진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인다.
    '삑 철컹 삑 철컹' 균일한 리듬을 유지하며 공장 로봇들이 각자 공정 단계 기능에 따라 움직인다. 전 과정에서 위치가 살짝 삐뚤어져 불량 난 제품을 레일에서 들어내는 유진.

    유진 (NA)
    그때부터였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게… 싫었고
    약점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삑 철컹 삑 철컹, 어느새 공장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고 있는 유진.

    유진
    (작게 읊조린다) 삑 그리고 다음 삑 그리고 다음

    균일한 기계음이 힙합 비트로 변해가며…
    50 지하 클럽 안/ 밤

    무대 위에서 파워풀한 랩을 하는 유진. 특목고 준비 중이던 친구와 함께 듀오 공연 중이다.

    유진
    비틀비틀 거리는 걸음이 나다운 거 같아
    깊은 늪에 빠져있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 난
    난 늪에 빠진 기분이 어떤진 모르겠으나
    넌 갈 수 있어 지평선 너머의 미지의 곳으로
    삶이란 흐르는 오케스트라 우리는 마에스트로
    삑 그리고 다음 삑 그리고 다음
    삑 그리고 다음 삑 그리고 다음
    <바코드 - 하온&빈첸 가사 일부>

    노래가 끝나자 작은 규모의 군중 박수와 휘파람이 쏟아진다.
    땀에 쫄딱 젖어 씨 이익 웃는 유진, 두 눈이 반짝인다.
    51 유진의 방/ 낮/ 현재

    헐렁한 추리닝 차림에 수염이 거뭇한 유진.
    어릴 적 만들었던 자신의 곡을 틀어놓고선 미소를 띤 채 추억에 잠겨 있다.
    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리고 유진이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는다.

    전화 (E 강 형사)
    유진 씨 접니다. 예전에 송 영아 씨 집 찾아간 적 있다 했죠.
    거기 어딘지 기억납니까?

    유진
    (살짝 인상 쓰며) 아… 예 기억은 나는데요.
    52 주택 대문 앞/ 낮

    유진이 십 년 전, 찾아갔던 주택 대문 앞에 서 있다. 옆에는 강 형사도 함께다.
    강 형사가 차임벨을 누른다. 유진, 손을 꾹 말아 쥐고는 살짝 긴장한 듯 보인다.
    집 안에 사람이 없는지 아무 반응이 없다. 그때 뒤에서…

    아주머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장바구니를 들고 부쩍 피곤해 보이는 통통한 아주머니가 의심스러운 듯 둘을 쳐다본다.

    강 형사
    아…여기 송 영아 씨 댁 아닙니까?

    그러자 여자가 안색이 싹 굳으며 대답 않고 대문을 따고 들어가 급히 문을 쾅 닫는다.

    강 형사
    (낌새가 이상하다) 어어~ 저기 잠시만요. 서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협조 바랍니다. (큰소리로 붙잡듯) 어차피 또 올 건데 그냥 지금 얘기하시죠.

    삐이익 부저가 울리며 대문이 열린다.
    53 주택 안/ 낮

    유진이 힐끔거리며 집 안을 둘러본다. 낡고 오래된 벽지, 샷시 인테리어에 반해
    최신 가전으로 채워진 집 안. 벽에는 단란한 가족사진이 걸려있고…
    TV장 위 줄줄이 어린 남자애 사진도 놓여있는데 예전에 유진이가 꿀밤 먹였던 그 남자애다.
    아주머니가 머쓱해 하며 물 두 잔을 내온다.

    경과.
    아주머니
    저희가… 거진… 15년째 여서 살고 있는데…
    월세로 계속 살았거든요, 근데 저희가 상황이 좀 그래서
    집 빼려고 주인한테 연락하려니까 통 연락이 안 되는 거에요.
    아니, 저희도 보증금을 빼줘야 나가는데… 연락이 안 되니
    뭐…월세 안 내면 연락 오겠지, 배 째라 하고 살았는데…
    그게 그러다 그러다 지금까지 살았어요.

    강 형사
    그러니까 집주인 송 영아 씨랑 연락 안 된지가 12년 전
    이라는 거에요? (어이없어서) 아니 그러면 신고를 했어야죠,
    여태 눌러 살면 어쩝니까?

    아주머니
    저희도 급한 불 끄고 사느라… 경황이 없어서…

    혀를 탁 차는 강 형사, 물을 들이켠다.

    경과.
    아주머니
    그니까 … 그때 계약 당시에 한번 보고는 못 봤는데…
    기억은 나죠. 내 나이 또랜데 참 고왔던 기억이 나…
    옷두 그 뭐야, 일하는 여자처럼 딱 정장 갖춰 입구 생긋생긋
    잘 웃는데… 암튼 부럽드라구. 난 월세 전전하는데… 그 여자는 집두 자가에… 월세 내놓으면서 쩌어기 어디, 멀리 외국 나갈지도 모르니까 연락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그랬어요.

    강 형사
    멀리 외국, 어디요?

    아주머니
    거기 신혼여행 잘 가는 데 있잖아, 그 쬐는 섬 어디냐…

    유진
    (가라앉은 톤) 하와이요?

    아주머니
    (탁자를 치며) 어 하와이! 맞아, 거기!

    강 형사
    (유진에게) 하와이…? 하와이에 뭐 일 있어요?

    고개를 가로젓는 유진.
    경과.
    강 형사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둘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유진에게 말을 붙여오는 아주머니.

    아주머니
    저기… 집 주인 분 아드님 맞죠? 나 깜빡한 게 있네.

    유진
    예?

    아주머니
    여서 잠깐 기다려 봐요.

    빛바랜 편지 봉투 한 뭉치를 들고 나와 유진에게 건네는 아주머니.

    아주머니
    계약할 때… 집주인분이 이거를 일 년에 한 번씩만 대신
    좀 부쳐달라 부탁하셨거든요. 삼 년 동안은 잘 갔을 건데…
    내가 상황이 이렇게 되곤 다 못 보냈네…

    편지 봉투 꾸러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유진.

    54 주택 대문 앞/ 낮

    대문을 열고 나오는 유진과 강 형사.

    강 형사
    (능청) 거 뭐야? 나도 좀 보자.

    유진
    됐거든요. 저만 볼 거에요.

    강 형사
    그러시든가. 그나저나 뭔 하아와인지… 그 주인에 그 로봇인가 꽁꽁 숨어 소식도 없고~ 너무 야속들 하시네.

    유진


    강 형사
    언제 술 땡기고 적적하면 나 불러. 형 해줄게.

    유진
    됐다니까요.

    강 형사
    사람이 그리 차면 못써.
    아무튼 내가 송 영아 씨 출국 기록 찾아보고 연락할게.
    55 유진의 방/ 저녁

    유진 홀로 방 안에서 편지 봉투를 열어본다.
    안에는 하와이 바다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엽서가 들어있다.
    사진 뒷장엔 단정한 글씨체로 쓰인 편지글이 있다.

    유진아 잘 지내니. 여긴 날씨가 정말 좋아. 엄마는 와이키키 섬에서 머물고 있어. 널 두고 혼자 와서 미안해. 지금쯤이면 5학년 형이 되어 있겠구나. 우리 유진이 키는 얼마 컸을까? 커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 엄마가 옆에 없지만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어. 엄마는 조금 더 여행이 길어질 것 같아… 사랑해!

    편지를 읽은 유진의 표정이 굳는다.
    유진이 다른 봉투에 든 편지도 꺼내 읽어보지만 다 비슷한 내용에 날짜만 다르게 적혀있다.
    회의에 찬 웃음을 지어 보이는 유진. 편지 꾸러미를 바닥으로 내던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맨 꼭대기에 있는 백과사전을 꺼내는 유진.
    사전을 펼치자 그 안에 껴놓았던 몇몇 장의 엽서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에 나뒹구는 엽서를 모두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유진.
    56 유진의 집/ 낮/ 과거

    밝은 해가 드는 거실, 7살 유진이 혼자 블록을 바닥에 정렬하며 놀고 있다.
    TV에선 맑은 우쿨렐레 소리에 맞춰 한 여자가 나긋하게 훌라댄스를 추고 있다.
    화면 위 작게 프로그램 타이틀이 적혀 있다. '지친 마음에 힐링! 훌라댄스'

    문득 혼자 놀다 열려있는 방안을 바라보는 유진.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에게 밥을 떠먹이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경과.
    송 영아가 피곤한 얼굴로 방 안에서 나오자 유진이 그녀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인다.

    어린 유진
    엄마아 이거 봐, 내가 만든 거다!

    송 영아
    응 유진이 블록쌓기하고 있었구나…근데 왜 블록을… 위로 안 쌓고 옆으로 줄줄이 놓는 거야?

    어린 유진
    (자랑스레) 위로하잖아? 그럼 무너지는데 이렇게 하면 절대 안무너져.

    송 영아
    (상냥히)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되지 왜.

    어린 유진
    싫어! 다시 첨부터 혼자 해야 되잖아!!!

    송 영아
    엄마랑 같이하면 되지 왜…

    어린 유진
    엄마는 맨날 하다 그냥 가잖아. 아빠 땜에.

    송 영아가 말없이 슬픈 눈으로 미소 짓는다. TV에선 맘봇 홈쇼핑 광고가 흘러나온다.
    57 경찰서 안/ 저녁

    강 형사
    송 영아 씨 출국 기록은 없던데요. 아마 한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망신고 실종신고 들어온 것도 없고요.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사시는 건지… 근데 송 영아 씨 원래 무슨 일 했어요?

    유진
    아버지 보느라 따로 일은 안 하셨고…
    젊을 때 옷 만드셨어요.

    강 형사
    아버지를 봐요?

    유진
    아버지가 저 태어날 때부터 아프셨는데…
    엄마가 거기에만 매달리셨어요.

    강 형사
    아…음… 그렇구나… (화제 돌리며) 아니 지금 상황이 진척이 없고 그래요. 근데 내 감이 말이지… 이상해. 둘 다 사라진 게 좀… 이상하다니까. 이런 건 계좌조회 하면 딱 답 나오는데 현재로선 혐의가 확정된 게 아니니 영장 발부가 안 돼요. 그래서 말인데… 유진 씨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안 되냐고, 아니 이런 건 친족이 실종 신고하면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데 말야.

    유진
    (냉랭하게) 저기요. 내가 왜 찾아요? 그 여자를.
    저 지금 피해 보기 싫어서 꼬박꼬박 출석하고 있는 거지,
    형사님 밥줄 이어주려고 나오는 거 아니거든요.

    강 형사
    (살살 달래는 투로) 아 거참.. 싸가지도 디게 없네. 알았거든?

    유진이 자리서 일어나려는데 강 형사가 뒤에서...

    강 형사
    유진 씨. 그… 뭐라 나 누구 편드는 거 싫고 그런데…
    그 아픈 사람 돌보고 그러는 거 보통일 아니었을 거에요.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을 거라고…

    유진이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있다가 이내 발을 뗀다.
    58 병원 복도/ 밤

    어두운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강 형사. 어느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59 병실 안/ 밤

    강 형사가 문을 조용히 열자 침대에 산소 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인기척에 보조 침대에서 잠을 자던 중년 여자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중년 여자
    어.. 왔어?

    강 형사
    (작게 속삭이며) 너 이제 들어가 자라.
    슬이 오늘은 좀 어땠는데.

    중년 여자
    (비몽사몽) 그냥 …다행히 더 수치가 나빠지진 않았대.

    강 형사 곤히 자는 여자아이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듬성듬성 빠져있는 머리를 한 번 쓸어주려다 말고 손을 이내 거둔다.

    강 형사
    슬이 엄마, 나 서에서 살았드니 (겨드랑이 냄새 킁킁 맡으며) 씻어야지 원. 좀만 여 더 있어 봐.
    60 트럭 안/ 밤

    어두운 밤, 산길을 달리고 있는 트럭… 길이 고르지 않은지 트럭이 덜컹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싱글벙글한 투박한 인상의 트럭 운전사.
    그 옆 보조석엔 엄마로봇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트럭 운전사
    거의 다왔디야. 미리 말해두건대 집 안 꼴이 말이 아녀라.
    애가 자꾸 크니께 인자는 손이 부짝 많이 가는데
    나이 든 엄니가 힘이 부치니께, 가면 잘 좀 혀줘.
    (엄마로봇 힐끔 쳐다보며)
    거 아직은 팍팍 잘 돌아가는 거 맞재?

    엄마로봇
    그럼요.

    트럭 운전사
    그러니께 주특기가 뭐라고?

    엄마로봇
    요리, 청소, 가계 설계, 등하교 돕기, 블록 쌓기, 보물찾기.

    트럭 운전사
    크~~~ 역시나 내가 득템을 해부렀구만.
    61 유진의 집/ 낮/ 과거

    송 영아가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파 위, TV 위를 살피며 뭔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송 영아
    유진아~ 보물찾기하자!

    어린 유진
    (쪼르륵 달려와) 엉 뭐야! 이번엔 뭐 찾을까?

    송 영아
    엄마 차 키.

    어린 유진
    알았어. 기다려봐~

    경과.
    어린 유진
    엄마 자! 여기.

    유진이 송 영아 앞에 차 키를 척 내놓는다.

    송 영아
    유진아 넌 어쩜 이렇게 척척 잘 찾아내?
    엄마는 통 안 보이는데… 고마워~

    어린 유진
    엄마 이번이 아홉 번 째야.

    송 영아
    벌써?

    어린 유진
    응. 엄마 그럼 이제 우리 보물 하나만 더 찾으면 테마파크
    가는 거지?

    송 영아
    그렇지~ 와 유진이 좋겠네.

    어린 유진
    아싸! 엄마 보물 또 찾을람 나 불러~

    경과.
    유진이 엄마가 요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꼼꼼히 메모하고 저울로 계량해가며 음식을 조리하는 송 영아.
    그 사이 슬그머니 어디론가 향하는 유진.

    안방.
    긴장한 듯 보이는 유진, 엄마 방을 쭉 둘러보다 서랍 위에 놓인 키를 발견하고 그걸 쓱 집어 제 주머니에 넣는다.
    62 유진의 방/ 밤

    유진이 이부자리에 누워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도로 일어나 베개를 들어 올려보는 유진.
    유진이 베개 밑에 깔린 열쇠를 한 번 확인하고 씨익 웃으며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맞은편 방에서 엄마의 째진 비명이 들려온다.
    놀라 눈을 번쩍 뜨는 유진.

    유진, 엄마 소리가 나는 쪽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63 아빠 방/ 밤

    열린 문 사이로 엄마를 쳐다보는 유진.
    송 영아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허둥대며 뭔가를 급히 찾고 있다.
    어린 유진
    (문 뒤에 서서) 엄마…

    송 영아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유진아, 유진아! 엄마 핸드폰 어딨어!
    빨리 찾아봐! 아빠 지금 급해!!!

    침대 위에 비껴 누워있는 아빠… 발작 증세를 보인다.

    어린 유진
    어…엄마… 그럼 이거 보물…

    송 영아
    (역정 내며) 그냥 빨리 찾으라고!!!

    어린 유진
    (눈물이 그렁그렁해선) … 저어기…

    손가락으로 침대 아래를 가리키는 유진.
    송 영아가 황급히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주워 덜덜 떨며 119를 누른다.
    64 구급차 안/ 밤

    사이렌을 켜고 달리는 구급차 안.
    송 영아, 이를 악물고 독한 눈빛으로 유진을 꽉 껴안고는 남편을 내려다본다.
    응급 요원들… 송 영아 남편 상태를 계속 체크한다.

    응급요원
    (침착하게) 위급합니다. 환자분 호흡 정지 왔습니다.
    65 응급실 대기실/ 밤

    유진, 잠옷 차림에 맨발로 대기 의자에 앉아있다.
    응급실 안에서는 고통에 찬 송 영아의 오열이 들려온다.

    송 영아 (O.S)
    아아아아악! 살려요. 무조건 살리라고. 이 이… 살려주세요…
    66 병실/ 낮

    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굽은 어깨에 퀭한 몰골의 송 영아…
    그 옆 유진이 엄마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아빠를 내려다본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미동 없이 누워있는 아빠.

    어린 유진
    (아빠를 향해 작게) 아빠… (엄마를 향해) 아빠 자?

    송 영아
    (초점 없는 눈으로) 응… 아빠 자…

    어린 유진
    언제까지?
    67 유진과 엄마의 일상 몽타쥬

    거실.
    해 들어오는 낮… 엄마와 함께 블록을 위로 쌓아 올리며 놀고 있는 유진.
    블록 탑이 우르르 무너지는데도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한다.

    테마파크.
    빠르게 도는 팽이 그네에 탄 유진.
    바람에 흩날리는 유진의 머리칼, 활짝 웃는 얼굴 위로 새파란 하늘이 빙빙 돈다.
    유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악을 쓴다.
    그네가 빙빙 돌고… 한 자리에 서서 유진을 바라보는 송 영아의 모습은 흐릿하게 보인다.

    욕실.
    씻은 유진의 머리를 꼼꼼히 수건으로 말려주는 송 영아.

    송 영아
    유진아 너 오늘 꿀잠 자겠다. 그치.

    어린 유진
    응, 근데… 자는 게 아까워.

    송 영아
    (웃으며) 자야 내일 또 놀지.

    어린 유진
    (천진하게) 근데 아빠가 계속 자니까 좋다.

    송 영아
    (당황)…어?

    거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 소파에 편히 늘어져 조용히 TV를 보고 있는 모자.
    유진은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잘 듯 말 듯 하고
    송 영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훌라댄스 프로를 보고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나른한 우쿨렐레 음악에 맞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살랑이며 훌라춤을 추는 여자.
    유연하고 느릿한 손놀림을 보고 있으니 시간마저도 느리게 흘러가는 듯 느껴진다.
    그녀의 춤을 바라보던 송 영아, 스르르 몸을 일으키더니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갑자기 춤추는 엄마에 잠이 깬 유진… 저도 따라 춤을 춘다.
    서로의 폼을 보고 키득 이며 즐거워하는 모자.
    송 영아가 천천히 옆으로 스텝을 밟으며 달을 그리듯 하늘 위로 팔을 둥그렇게 모은다.
    우쿨렐레로 연주되는 Hanalei Moon 전주가 흐른다.

    When you see Hanalei by moonlight
    (하날레이의 달빛을 보면)

    노래와 화면, 천천히 겹쳐지며…
    68 훌라처럼 흐르는 시간 몽타쥬

    병실.
    송 영아가… 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는 남편을 공허하게 응시한다.

    You will be in Heaven by the sea
    (당신이 있는 곳, 천국의 바다가 돼요)

    경과.
    고이 잠든 송 영아의 남편 얼굴 위로 스르르 흰 천이 밀려 올라와 덮인다.

    Every breeze, every wave will whisper
    (모든 미풍과 파도가 속삭이네)
    You are mine don't ever go away
    (나만의 당신… 절대 떠나지 말아요)

    장례식장.
    조용하고 쓸쓸한 분위기. 조문객이 드문 장례식장 안…

    Hanalei- Hanalei moon— (하날레이- 하날레이의 달빛—)
    Is lighting beloved Kaua?i (정든 카우아이섬을 비추네)

    울지도 않고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표정의 송 영아.
    그 옆에 꼭 붙어 앉아 변화 없는 엄마의 얼굴을 살피는 유진.

    아빠 방.
    유진의 아빠가 누워있던 침대에 작은 곰 인형이 햇살을 맞으며 누워있다.

    Hanalei- Hanalei moon— (하날레이- 하날레이 달빛—)
    Aloha n? wau i? ?oe (사랑한다, 당신에게 말해요)

    고요히 멀어지는 노래…
    유진이 이불을 끌어당겨 곰 인형의 턱까지 덮어준다.
    경과.
    송 영아가 곰 인형을 들고 아빠 방에서 나온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유진에게…

    송 영아
    (힘없이 짜증 내며) 유진아 물건 제자리 놓으랬지…
    왜 자꾸 꼬미를 저따 두는 건데.

    어린 유진
    응. 아빠가 맨날 있었는데, 없으니까 침대가 쓸쓸하대.
    꼬미가 있으면 괜찮대.

    송 영아

    69 안방/ 아침

    섬세한 레이스로 짜인 흰 블라우스에… 롱 플레어 치마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송 영아. 방 한쪽 구석엔 뜯지 않은 쇼핑백이 가득하다.
    유진이 화장하는 엄마 뒤로 슬며시 다가온다.

    어린 유진
    엄마 오늘 어디가?

    송 영아
    것두 몰라? 너 오늘 학예발표회잖어.

    어린 유진
    (의아하다는 듯) 오늘이야? 내 발표회가?

    송 영아
    으이구~ 빨리 갈 준비해.
    70 유치원 문 앞/ 낮

    유진이 손을 잡은 송 영아. 유치원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다.

    선생님
    (새삼 놀라며) 어머… 어머님… 유진이 이번 주까지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송 영아
    (밝게) 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아니 오다가 길을 헤매가지구요… 하도 오랜만이라… 근데, 벌써 다 끝난 거에요?

    선생님
    네? 아니요~ 지금 애들 점심 먹구 있어요.
    유진이도 같이 먹으면 돼요.

    송 영아
    아… 점심 먹고 발표회 하나요? 시작 시간이 열 시였던 것 같은데… 아닌가…

    선생님
    아~ 어머니 날짜를 착각하셨구나. 오늘 아니고 내일이에요.
    열 한시요.

    송 영아
    (당혹스러워하며) 아… 제가 잠시 착각했나 봐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 (유진을 향해) 다행이다.
    엄마 늦은 줄 알았는데… 내일이래.

    어린 유진
    (들떠서) 쌤 우리 엄마 진짜 이쁘죠!
    울 엄마 원래가 패션디자이너에요.

    선생님
    아, 그러셨구나… 어쩐지…

    선생님이 송 영아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무릎 기장 스커트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잠옷 바지를 포착한다.

    패션 센스가 남다르시다…하하
    71 양옥 집 안/ 낮/ 현재

    온갖 잡다한 물건 늘어져 있는 어수선한 집 안,
    무표정한 엄마로봇과 그녀를 아니꼽다는 듯 노려보고 있는 트럭 운전사의 노모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옆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살배기 애 하나가 바닥을 기어 다닌다.

    엄마로봇
    죄송하지만 얘는 내 아이가 아니에요.

    노모
    시방 뭐라는겨. 니가 할일이 뭐냐? 애 보는 거 아녀.

    엄마로봇
    저는 아무 아이나 키우지 않습니다.

    노모
    (약이 바짝 올라) 뭐여. 야가 아무 애여?
    얘가 소중한 내 시낀디? 어디 아무 애여!!!

    엄마로봇
    아 할머님 새끼시군요. 그렇다면 할머님께서 보시면 되겠네요.

    노모
    (고래고래 역정 낸다) 아니 이 년이 증말, 철물 주제에!
    니까짓게 뭐라고!!! 자고로 기계는 두들겨야 지대로 작동을
    헌다고.

    순식간에 손을 치켜들어 엄마로봇의 머리를 퍽 내리치는 노모.
    휘청이다… 완전히 멈춘 듯 가만히 노모를 쳐다보는 엄마로봇. 그 눈빛이 왠지 서늘하다.
    노모가 다시 손을 들어 때리려고 하자 엄마로봇이 재빨리 도망친다.

    창고 안.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1평 남짓한 비좁은 창고에 급히 들어온 엄마로봇.
    문고리를 탁 걸어 잠근다. 밖에서 소리 지르며 문고리를 세차게 흔드는 노모.
    잡동사니 더미에 몸을 누이는 엄마로봇.

    엄마로봇
    유진이 밥 먹을 시간인데…

    문밖.
    노모
    (씩씩대며) 야 이년아 빨리 안 나와? 아이고 내 저 고물 년을 집안에 들여서 편해 볼라다가 열 뻗쳐 죽겄네. 저거 저거 폐기해야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하는 노모.
    72 경찰서/ 저녁

    강 형사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강 형사
    (사무적으로) 예… 근데요.
    (자세 고쳐앉으며) 아 예. 맘봇 M874086호요?
    찾았습니까? 아 예, 지금 가겠습니다.
    73 AI 사이버 과학수사센터/ 낮

    복도.
    유진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다.

    강 형사
    (유진을 보고 손 흔든다) 어 여기!
    유진과 강 형사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가며…

    강 형사
    지금 혹시 몰라서 따로 격리 중이고… 분해 작업하기 전에
    유진 씨가 증거수집 동의서 작성해야 하거든요.

    사무실.
    조사관이 유진에게 서류를 넘겨준다.

    조사관
    이거 찬찬히 읽어보시고요. (서류에 몇몇 부분 동그라미 치며)
    바디 분해하고 나서 다시 복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동의하셔야 수사 진행되고요. 혹시라도 무혐의 판정 나면 보상금 일부 지급되니까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없습니다.

    유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문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엄마로봇 (O.S)
    유진아! 유진이니? 엄마야!!!

    서명하려다 멈추곤 뒤를 돌아보는 유진.

    유진
    …저기 있는거에요?

    조사관
    (대수롭지 않게) 아 네. 일단 혹시 몰라서 저쪽에 뒀어요.

    가만히 서류를 내려보는 유진.
    더 세게 쾅쾅, 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유진을 부르는 엄마로봇.

    조사관
    (돌아보며) 아 짜증 나게 왜 저래… 가서 배터리 죽이고 올게요.

    조사관이 열쇠로 문을 열자마자, 잽싸게 안에서 튀어오는 엄마로봇.
    유진에게 다가가 그를 포옹한다.

    엄마로봇
    유진아!

    유진
    (떨떠름하여) 어…

    엄마로봇
    보고 싶었어…

    그때 뒤에서 조사관이 엄마로봇을 잡아끌고 도로 가두려 한다.
    엄마로봇이 놔요 놔요!! 놓으라고!!! 데시벨을 최대로 높여 사무실 안이 떠나가라 부르짖는다.

    유진
    (다급히) 저, 잠깐만요! 그냥 배터리 닳을 때까지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그리고나서 해도 되잖아요. 그거…

    조사관
    안됩니다. 증거물 훼손 가능성 있어서요.

    엄마로봇
    (조사관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유진이… 집 가서 밥 차려줘야 해요.

    조사관이 성가시다는 듯 강 형사를 바라보자, 강 형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사관
    (선심 쓰듯) 아 예 그러세요. 그럼 오붓한 시간 되실 수 있게
    두 분 모두 이쪽으로~

    엄마로봇이 갇혀있던 방으로 도로 안내하는 조사관.
    74 취조실 안/ 오후

    한쪽 거울 유리에 사방이 밀폐된 어두운 취조실 내부.
    엄마로봇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유진.
    유진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이 없다.

    엄마로봇
    (미소) 유진아 잘 지냈어?

    유진
    똑같지 뭐... 어디서 뭐 하고 지냈어?

    엄마로봇
    유진이 생각뿐이었어. 밥은 잘 챙겨 먹었어?
    영양제는 꼬박꼬박 먹었지? 지금 너 밥 먹을 시간 한참 지났는데…우리 집엔 언제가.

    유진
    (시선 피하며) 곧.. 가야지.

    엄마로봇
    (어딘가 슬픈 미소) 거짓말…엄마는 다 안다고 했잖아…

    유진
    (피식 혼잣말하듯) 아니. 엄만… 아무것도 몰라.
    엄만 내가 어떤 기분인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안 적 없을 거야…

    엄마로봇


    유진
    엄마가 떠난 이후로 나는 쭉 혼자야.

    엄마로봇
    엄마가 여기 있잖아.

    유진
    엄마는… 엄마가 아니야.

    엄마로봇
    …도움이 못 돼서 미안.

    유진
    미안할 필요 없어. 엄만 잘못 없어.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거니까…
    그렇게 남겨둔 사람이 잘못한 거야.

    엄마로봇
    유진아… 엄마는 떠나지 않아… 유진이 곁에 항상 있을 거야.

    엄마로봇의 손목에서 작은 배터리 부족 신홋불이 깜빡인다.

    유진
    엄마… 선배… 진짜 엄마가 그런 거야?

    엄마로봇
    엄마는 도와준 거야. 도우려고 한…거야…

    엄마로봇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똑바로 눈을 뜬 채 그대로 작동 중지된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유진.

    취조실 거울 유리 뒤편.
    착잡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강 형사.

    조사관
    …저거 어차피 다 프로그래밍 된 거라고요.

    강 형사.
    그래. 근데 마음이 그냥 그렇네…
    75 분석실 안/ 밤

    수사관
    형사님… 일단 AI 내장 렌즈에 찍힌 데이터 영상확보 했구요.

    수사관이 2030 .2. 4일 23시 영상 파일을 모니터에 띄워 재생한다.
    76 차 안/ 밤/ 과거

    영상화면.
    엄마로봇의 시점으로 보이는 오 덕훈의 차 내부.
    오 덕훈이 엄마로봇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오 덕훈
    …사랑해요. 엄마 엄마 저를 받아주세요.
    제가 다 모시고 살게요.

    엄마로봇이 오 덕훈을 밀어낸다.

    엄마로봇
    당신은 내 아이가 아니에요.

    오 덕훈
    아들 친구도 아들이나 마찬가지라면서요.
    (눈빛 변하며) 엄마까지 이러시면… 저 진짜 죽어요. 죽는다고요…

    갑자기 차 앞좌석 서랍을 뒤지는 덕훈, CD를 꺼내 들더니 뚝 부러뜨린다.
    날카로운 CD 파편을 제 목에 겨누는 덕훈.

    엄마로봇
    진정하세요. 이러면 안 돼요.

    오 덕훈
    왜요.. 나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해요?
    그냥 안 살래요… 나도 이렇게 사는 거 지긋지긋해…
    진짜… 끝내고 싶어. 그니까 그냥 두시라고...
    같이 살아줄 거 아니면 좀 내버려 두시라고!

    뾰족한 CD파편을 목덜미에 가져다가 꾹 누르는 오 덕훈. 피가 맺힌다.
    차마 CD를 더 깊게 밀어 넣지는 못하고 몸을 들썩이며 흐느끼는 오 덕훈.

    엄마로봇
    도와줄게요… 심호흡해보세요.

    엄마로봇이 덕훈이 CD를 붙들고 있는 손을 꼬옥 잡고선…
    그대로 힘을 가해 CD파편을 깊이 목에 눌러 박는다.
    순간, 오 덕훈의 목에서 솟구치는 피. 정지.
    77 분석실/ 밤/ 현재

    영상 화면이 일시 정지되어 모니터에 떠 있다. 강 형사가 아연하여 짧은 한숨을 뱉는다.

    수사관
    살인증거는 확실한데… 왜 저런 건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네요. 본체에 해킹 흔적이나 악성 프로그램 감염은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아무래도 기본 프로그램 세부 분석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78 유진의 집/ 밤

    불 꺼진 집 안.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TV 소리만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마치 사람 무릎베개를 베고 누운 듯 소파에 웅크려 누워 멍한 채로 TV를 보고 있는 유진.
    휴대폰이 울린다. '강 형' 이름이 뜬다. 유진이 수신 거부 누르려다… 받는다.

    유진
    네…

    전화 (E 강 형사)
    아직 안 자죠? 그… 해부했고요. 분석 결과 나왔어요…

    통화 중에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는 유진.
    물을 따라 마시며 부엌 상부장에 엄마로봇이 가지런한 글씨체로 꼼꼼히 적어둔 메모를 훑어본다.

    전화 (E 강 형사)
    사건 당일, 오 덕훈 씨가 쓰레기장에서 로봇을 만났고
    잠깐 유진 씨 보겠다고 본인 집에 들렀던 거 아세요?
    그때 나가면서 오 덕훈이 유진 씨 로봇을 끌고 갔어요.

    그 말을 들은 유진, 번뜩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부엌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구겨진 포스트잇을 꺼내는 유진.
    엄마로봇이 떠난 그때… 남기고 간줄만 알았던 무정한 메모다.

    잘 지내. 난 떠나.

    휘날려 쓴 글씨체… 엄마로봇 글씨체와 다르다.

    전화 (E 강 형사)
    보니까 오 덕훈 씨 정신과 상담도 여러 차례 받은 이력이 있고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유진 씨 로봇이 오 덕훈 씨를 살해한 건 맞습니다.
    자세한 건 오셔서 얘기합시다. 내일 오세요.
    79 분석실 안/ 밤

    어제.

    수사관
    로봇 행동 코드 분석 결과 나왔습니다.

    수사관이 정육면체 작은 디바이스를 강 형사에게 내보이며

    수사관
    여기에 송 영아 일상 녹화 영상이 들어있어요.
    송 영아 메모리를 기반으로 로봇이 환경 감지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건데요.
    간혹 로봇이 습득한 데이터가 방대해지면 명령어나
    프로그램을 자가해석해서 행동하기도 하거든요.
    아무래도 그런 문제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수사관이 모니터에 영상 파일 하나를 재생한다.

    영상 화면.
    침대에 기대앉아있는 힘 없는 송 영아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 남편의 어깨를 누군가 세차게 앞뒤로 흔든다.

    송 영아 (O.S)
    (울분을 토하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래!!!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리던 남편… 곧이어 발작 증세를 보인다.

    조사관이 영상을 스킵하더니 다른 파일 영상을 불러들여 재생한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남편.

    송 영아 (O.S)
    미안해…

    스르르 남편의 호흡기를 벗겨내는 하얀 손.
    80 유진의 집/ 밤

    78씬과 이어지는… 강 형사와 통화 중인 유진.

    전화 (E 강 형사)
    그리고…송 영아 씨 앞으로 정식 체포영장 발부되었습니다.
    81 조사실/ 밤

    송 영아의 계좌 내역을 훑어보는 강 형사.
    가장 오래된 거래 내역을 살펴보면 보험회사에서 입금된 보험금과
    그 뒤로는 매주 유진의 계좌로 칠 만 원씩 자동이체 되고 있으며
    육 개월에 한 번씩 계좌주 '와이키키 타운' 천만 원씩 입금되는 것이 현찰 움직임의 전부다.

    강 형사
    와이키키 타운이 뭐 하는 데야…

    강 형사가 휴대폰으로 와이키키 타운을 검색하자 결과 상단에 하와이섬이라고 뜬다.

    강 형사
    하여튼간 하와이에 뭐 있나…

    강 형사가 무심히 쭉쭉 스크롤을 내리자 작은 광고 배너 문구가 빠르게 지나간다.
    '휴양다운 요양! 강원도 와이키키타운'
    그때 뒤에서 자료를 뒤적이며 강 형사에게 다가오는 막내 형사.

    막내 형사
    형사님, 송 영아 씨 환자 기록 뗐구요. 그 보니까…
    (서류 뒤적이며) 서에 한 번 왔다 간 기록도 있는데요?

    강 형사
    뭐로 왔다가?
    82 병원진료실/ 낮

    강 형사가 의사와 마주하고 있다.

    의사
    (차트 살펴보며) 환자분… 위암 4기까지 갔고 3차 수술 후
    회복 중에 사망하셨습니다.

    강 형사
    정확한 사망원인이 뭐였습니까?

    의사
    환자분께서 퇴원 후 발작 쇼크가 와서 병원으로 실려 왔는데
    심폐소생술 받으셨고…며칠 후 뇌사로 사망하셨네요.

    형사
    쇼크 안 왔으면 살 가능성은 충분했던 겁니까?

    의사
    글쎄요… 쇼크가 안 왔어도 언제 떠나실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만…

    강 형사
    (엄마로봇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그때 환자분 아내 기억나십니까?

    의사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아 기억나네요…참…여러모로 안되셨었죠.
    83 병원 진료실/ 낮/ 과거

    진료 차트를 훑어보는 의사.
    그 앞에 앉아 있는 송 영아가 옷자락을 손으로 뜯으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간다.

    송 영아
    잘 먹질 못하구… 어제는 너무 많이 땀을 흘리고
    열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나마 먹은 것까지 다 토했어요.

    의사
    어느 정도는 억지로라도 먹어두셔야 해요.
    항암 약을 바꿨는데 아마 약이 세서 그런 걸 겁니다.
    몇 시간 간격으로 복용하셨어요? 열은 몇 도까지 갔죠?

    송 영아
    음… (한참 머뭇거린다)
    열이.. 몇 도였는진 자세히 기억이 안나구…
    약 복용은 선생님 지시대로 지켜서 먹인 것 같은데요…

    의사
    (미심쩍은 듯) 그니까… 식후 세시간 간격으로요?
    그럼 그대로 시간은 지키시되 투여량을 조절해서 처방할게요. 이번에 항암치료 끝나면 7차는 주기를 좀 당겨서 15일 날 오세요. 아 그리고 송 영아 씨… 이거.

    의사가 연명의료계획서라고 적힌 서류를 송 영아 앞으로 건넨다.

    전에 호스피스 상담사한테 얘기는 들으셨죠?
    남편분과 상의하고 다음번 진료 때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송 영아
    (떨떠름하게) 아… 네…

    생소한 듯, 서류를 받아들고 살펴보는 송 영아.

    송 영아
    아 그런데 선생님… 근데 그이.. 약은 언제 언제 먹이는 게 좋을까요?

    의사
    원래 복용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송 영아
    음… 말씀을 안 해주신 거 같은데… 제가 이번에 처방해주신 약에 대해선 못 들어서요. 아무래도 이이가… 계속 먹질 못하고 토하니까 부작용이 아닌가 걱정도 되고요…

    의사
    (안경 너머로 송 영아를 바라보며)
    송 영아 씨? 아까 시간 잘 지켜서 투여했다 하시지 않았어요?

    송 영아
    (자신 없게) 네… 잘 지켜서 먹었죠…

    의사
    언제, 언제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음…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못하는 송 영아.
    제 무릎에 놓인 연명의료 계획서를 멍하니 쳐다본다.

    송 영아
    (정말 모르겠다는 듯)… 선생님 근데 이게 뭐예요?

    의사, 심각한 눈으로 송 영아를 바라본다.

    의사
    송 영아 씨, 시간 되실 때 신경과 상담 한 번 받아보는 거
    어때요?
    84 병원 진료실/ 낮/ 현재

    책상 위에 뇌 MRI 사진이 놓여있다.

    의사
    (뇌의 한쪽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 이 부분, 수축 되어서 비는 거 보이시죠… 알츠하이머 중기쯤 진행된 상태에요. 아마 일상생활에 지장 있으셨을 텐데… 정작 본인은 스트레스 때문인 줄 아셨던 거죠.

    의사의 말을 듣고 있던 강 형사… 놀란 듯 고개를 든다.
    85 안방/ 낮

    방 안에 빈 박스 여러 개가 놓여있다.
    유진이 장롱에서 송 영아의 옷을 빼내 박스 안에 넣기 시작한다.
    옷을 빼내고 보니 장롱 아래 쌓여있는 노트 더미가 보인다.

    노트를 펴 보는 유진.
    빼곡하게 단정한 글씨로 암을 이겨내는 법, 항암 치료에 좋은 음식 레시피
    등 건강정보, 가계내역, 하루 스케줄 등등 자질구레한 메모가 상세히 적혀있다.
    간혹 몇 페이지 넘겨보면 송 영아가 일기처럼 적어놓은 글도 보인다.
    '극복 가능하다. 세상에 낫지 않는 병은 없다.' 로 시작하는 엄마의 기록…
    86 안방/ 낮/ 일기 속 과거

    볼펜을 들고 작게 중얼중얼대며 뭔가를 써 내려가는 송 영아.

    송 영아 (NA)
    오늘 유진이에게 화를 크게 냈다. 마트에 갔다가 유진이를 잃어버렸다. 유진이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나에게 거기에 있겠다고 말을 했다는데 나는 기억이 없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진이에게 왜 제자리에 가만히 안 있냐고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렀고… 유진이는 지금까지도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87 부엌/ 낮
    불 위에 올려둔 냄비에서 타는 연기가 난다.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와 가스 불을 끄고 환기 조치를 취하는 송 영아.

    송 영아 (NA)
    자꾸 이런 식이다. 잘 챙겨주지도 못하면서 화까지 내는
    엄마라니 최악이다. 그리고… 더 최악이 될 거라 들었다.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가망이 없다…

    송 영아, 눈이 빨개져 다 새카맣게 타버린 냄비를 벅벅 수세미로 닦고 있다.
    휘리릭,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며…
    88 거실/ 낮

    송 영아 (NA)
    차차 준비 중이다. 가장 좋은 엄마로 남을 준비. 이것만은 지키자. 화내지 말기. 매 순간 친절하게 대하는 엄마가 되기.
    잊어버려도 화내지 말기. 꼼꼼하게 챙겨주는 엄마가 되기.

    맘봇 회사에서 준 작은 녹음 렌즈 디바이스를 목에 거는 엄마.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밝게 웃어보려 애쓴다.
    89 아빠 방/ 밤

    송 영아 (NA)
    그이가 아픈 것을 알고…많이…고통스럽다는 것도 알지만
    쉽게 떠나겠다 생각하는 그이의 태도에 화가 난다.
    참아보려 해도… 내 마음이 그렇게 섭섭해진다.

    연명의료 계획서를 두고 … 마주하고 있는 부부.
    남편이 연명의료 계획 중단에 동의 표시를 한 뒤 서명을 마무리한다.

    송 영아
    …진심이야?

    남편
    응…

    송 영아
    그래도… 너무 한 거 아냐? 당신만 보던 나는 그러면...
    내가 무슨… 유진이는 어떻게 하라고.

    남편
    … 미안해…영아야… (앙상한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포갠다)
    내가 이래서 미안해…

    남편의 손을 내치는 송 영아, 고집스레 연명의료 계획서를 찢는다.

    송 영아
    (떨리는 목소리) …알면서 그래? 그럼… 힘든 사람 보람이라도 있게 최소한 의지는 보여야지! 당신 그렇게 맘 약하게 먹으면 우리 유진이는 어떻게 하라고… (울부짖으며 남편의 야윈 어깨를 때린다) 내가 그렇게 쏟아부었는데 다 때려치고 내가 다 쏟아부었다고!
    근데 왜 못산다 그래! 왜 남겨두고 가겠다 그래! 니가 어떻게 그래!!!

    송 영아의 목에 걸린 육면체 디바이스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녀의 힘에 덩달아 맥없이 앞뒤로 흔들리는 남편,
    갑자기 몸이 굳는 듯하더니 발작 증세를 보인다.

    송 영아
    (놀라서) 어어어…어어… 여보!! 여보!!!!
    90 구급차 안/ 밤

    깊은 물 안에 잠긴 듯, 사이렌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유진을 꼭 끌어안고 젖어 흐릿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송 영아.

    송 영아 (NA)
    아픈 사람이 가장 나쁠 때는 무책임해질 때다…
    아무리 책임을 져보려 해도 그것이 제힘으로 안될 때다.
    왜 하필 나는 그이와 만나서… 유진이를 남겨놓은 건지…
    91 병원 안/ 밤

    의사
    (침착히) 환자분 연명의료 동의했습니까? 보호자분? 어떻게 할까요.

    송 영아
    (울부짖으며) 해주세요! 살려요! 무조건 살려주세요!

    경과.
    의료진이 남편의 가슴에 전기충격을 가한다. 펑 소리와 함께
    슬로우 모션으로 그의 앙상한 가슴이 붕 공중에 떴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92 병실 안/ 밤

    산소호흡기를 끼고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남편… 그를 내려다보는 송 영아.

    송 영아 (NA)
    내가 그이를 완전히 깜깜한 데로 내몰았다.

    송 영아가 남편에게 가까이 몸을 수그려서 산소호흡기를 천천히 벗긴다.

    송 영아
    (혼잣말) 미안해…

    그녀의 가슴에 걸려있는 디바이스에 작은 불이 깜빡인다.
    화면 툭 끊어지듯 까매진다.
    93 유진의 집/ 낮

    딸깍, 스위치 켜는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꺼졌던 방이 밝아진다.
    송 영아가 뭔가 찾는 듯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도로 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파 위 TV 위를 살펴보다가…

    송 영아
    (착잡하나 애써 밝게) 유진아~ 보물찾기하자!

    어린 유진
    (쪼로록 달려와) 엉 뭐야! 이번엔 뭐 찾을까.
    경과.
    유진이 자랑스럽게 웃어 보이며 송 영아 앞에 차키를 내보인다.

    송 영아
    유진아 넌 어쩜 이렇게 척척 잘 찾아내?
    엄마는 통 안 보이는데… 고마워~

    어린 유진
    엄마 이번이 아홉 번 째야.

    송 영아
    (가슴이 내려앉는 듯) …벌써?
    94 열쇠 방/ 낮

    작은 열쇠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송 영아.
    열쇠 기사가 가게로 들어오는 송 영아를 보고 반가운 기색을 내비친다.

    열쇠 기사
    어이쿠 사모님 오셨어요? 열쇠 복사하시게? 이번엔 몇 개나?

    송 영아
    아뇨… 저 오늘은 다른 것 좀 부탁드리려고요.
    혹시 주소 각인 목걸이… 그런 것도 되나요?

    열쇠 기사
    미아 방지 팔찌 같은 건가? 예 가능하죠~ 주소 불러봐요.
    95 거실/ 낮

    흰 유니폼을 입은 맘봇 회사 직원 둘이 커다란 박스를 송 영아 집 안에 옮겨 놓는다.
    송 영아가 박스를 개봉하여 뽁뽁이를 뜯자, 송 영아를 본 떠 만든 엄마로봇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송 영아... 손을 뻗어 그녀의 매끈한 실리콘 피부를 조심히 만져본다.

    송 영아 (NA)
    새로운 나를 맞이했다. 잊지도 화를 내지도 늙지도 않는 가장 착하고 내가 될 것이다. 특히 유진이에게는 가장 멋지고 사랑만 주는 나였으면 좋겠다.
    96 부엌/ 낮

    부엌에서 요리 중인 송 영아.
    문득 뒤돌아보면 거실에서 젠가 놀이를 하고 있는 유진과 엄마로봇이 보인다.

    송 영아 (NA)
    오늘을 무사히 보내고 행복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항암치료에 좋은 것만 먹인다고… 유진이는 제 입에 맞는 걸 못 먹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유진이가 펜케잌을 제일 좋아한다. 그게 엄마가 해준 음식 중 최고란다. 인스턴트 펜케익을 제일 좋아하니 왠지
    서글픈데… 그나마 그거라도 맛있게 잘 먹어줘서 다행이다.

    그릇 안에 계란을 풀고 펜케잌 믹스 봉지를 털어 넣는 송 영아.
    펜케잌 봉지를 탈탈 털어보지만 모자란 양이다.

    송 영아
    유진아 엄마 마트 다녀올게. 둘째 엄마랑 집 잘 보고 있어.

    유진이 멀리서 응~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97 안방/ 낮/ 현재

    엄마의 일기장을 덮는 유진. 만감이 교차하는 듯 동공이 흔들리고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어 강 형사에게 전화한다.

    유진
    형사님… 나 엄마… 실종신고 할게요…

    전화 (E 강 형사)
    유진 씨,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98 차 안/ 낮

    굽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차 안. 운전하는 강 형사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유진.
    턱을 괴고 창밖의 울창한 숲을 바라보는 유진. 둘은 아무 말이 없다.
    99 경찰서/ 낮

    81씬과 이어지는…

    막내 형사
    현장보고서에요. 송 영아 씨가 길을 잃었다고 자발적으로 서에 찾아왔네요. 주소 표식이 있어서 무사 귀가조치 했다고 적혀있어요. 그 주소지가…
    100 시내/ 낮/ 과거

    길 한복판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송 영아, 스쳐 지나가는 아주머니의 옷깃을 붙잡는다.

    송 영아
    (거의 울 것 같은 얼굴) 저기요… 나 부탁 좀 할게요… 나…
    근처 파출소 좀 데려다주실 수 있으세요.
    101 파출소/ 낮

    송 영아
    아저씨… 제가 여기 사는데… 좀 데려다주세요.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끌러 순경에게 내미는 엄마.
    순경이 펜던트 뒤에 각인된 주소를 확인한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와이키키 타운'
    102 요양소 앞/ 낮

    유진과 강 형사가 차에서 내린다.
    숲이 둘러싼 삼 층 규모의 건물이 보인다.
    낡은 간판에는 와이키키 타운 요양원이라고 적혀있다.
    103 요양소 복도/ 낮

    철장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복도…
    간호복을 입은 여자가 앞장서 걷고 그 뒤를 유진과 강 형사가 따른다.
    요양관리사 (V.O)
    송 영아 씨는 자발적으로 준비해서 오신 분이에요…
    들어 오셨을 때도 정정한 편이셨구요.
    근데… 이제는 아무도 못 알아볼 거에요.

    어느 병실 앞에 멈춰서는 요양관리사. 유진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듯 눈빛을 준다.
    104 요양소 병실 안/ 낮

    문을 열자 등을 돌리고 흰 베드 위에 앉아있는 왜소한 체격의 여자, 뒷모습이 보인다.
    유진이 가까이 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 묶인 듯 서 있다.

    유진
    (작게 중얼거리듯)… 엄마…

    그러자 서서히 등을 돌려 얼굴을 보이는 그녀.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유진을 바라본다.

    몇 초간 두 모자가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유진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그의 시야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 뿌옇고 흐릿하게 보인다.
    이윽고 천천히 다시 등을 보이며 돌아앉는 송 영아.
    흐린 윤곽의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작은 바위처럼 보인다.

    암전.

    105 요양소 앞 벤치/ 낮

    유진이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다.
    강 형사가 커피를 뽑아와 유진과 조금 떨어져 앉는다.

    강 형사
    (커피 건네며) 자.

    유진이 고개를 젓는다.

    강 형사
    쥐고라도 있어…

    유진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마지못해 받는다. 둘이 한참 말 없이 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강 형사
    (나지막이) 온 거 후회돼?

    유진
    …글쎄요

    강 형사


    유진
    엄마가 차라리 안 떠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그냥 같이 살았으면 더 나빴을까요.

    강 형사
    좋고 나쁘고가 어딨어. 그냥 사는 거지…

    유진


    강 형사
    너도 근데 참 무서웠겠다. 그때… 어머니가 매일 안 돌아올 때… 그래도 너…어떻게 잘 컸구나…

    유진이 괜히 고개 푹 숙이더니 커피를 한 모금 꿀꺽 마신다.

    강 형사
    나는… 딸 하나 있는데 걔가 언젠가 집에 안 온다 생각하면…내가… 잘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벌써 드는데…

    유진
    시집가요?

    강 형사
    아니 아홉 살이야.

    유진
    (픽 웃는다) 형사님 너무 집착하시는 것도 별로에요.
    때 되면 쿨하게 보내셔야죠. 있을 때 잘하시고요.

    강 형사
    그래… 그래 그래야지… 근데 나 그런 쪽으론 절대 못 쿨해…

    시큰해지는 코끝을 괜히 찌푸리며 커피를 들이켜는 강 형사.
    106 아파트 주차장/ 밤


    이다은

    이다은

    1991년생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 영상시나리오학과 졸업

  • 각본 이다은

    기획 의도

    '엄마로봇' 은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고 남겨진 자들의 상실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혼자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로봇만 남겨두고 자식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 의 진심과
    온기가 닿았으면 합니다.


    등장인물

    유진 남 29세
    구속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7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가 버린 이후로 쭉 혼자였고 혼자가 편하다고 느낀다. 음악 프로듀서로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며 밤낮 바뀐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송 영아 여 55세
    유진의 친모. 암 투병하던 남편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과 엄마로봇만 집에 남겨두곤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로 연락 한 번 없으며 생사도 불분명하다.

    엄마로봇
    엄마들을 위해 아이들을 돌봐주는 맞춤형 감성 지능 탑재 로봇.
    외형은 아이의 엄마 형상을 본떠 주문 제작됨으로 30대 초반의 송 영아 모습과 똑같다.
    떠난 송 영아를 대신하여 유진의 곁에서 산지도 22년째, 구형 로봇이 되어가는 그녀는 하던 일을 잘 잊어버리기도 한다.

    오 덕훈 남 32세
    유진의 가장 친한 대학 선배다. 그러나 유진과 최근에 크게 다퉜고…
    어느 날 차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강 형사 남 49세
    오 덕훈 살인 사건을 맡은 형사. 겉보기엔 무쇠 같고 무뚝뚝하게 생겼는데 자꾸 말을 걸어보면
    묵직하고 뜨뜻한 정을 툭툭 던져주는 남자다.

    시놉시스

    TV에서 맘봇 광고가 흘러나온다. "어머님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시죠? 바쁜 워킹맘, 사랑과
    커리어, 자기계발에 더 집중하시고 싶은 엄마들을 위해 출시했습니다. 맘봇! 내 아이에게 가장
    따뜻한 엄마를 선물해 주세요. 바디는 최첨단 실리콘 피부로 의뢰인의 형상을 똑같이 본떠
    제작해드리며 3개월간 어머니의 음성, 말투, 습관, 행동 사고를 전부 녹화하여 저장해둔
    육면체 디바이스가 맘봇 바디에 이식되어 가동됩니다."

    유진은 (남 29) 7살 때 집 나간 엄마가 남기고 간 로봇과 살아가고 있다.
    이미 다 커버린 그인지라 엄마로봇의 도움이 필요 없지만, 그녀와 같이 산 지도 어느덧 22년째. 엄마로봇은 있는 듯 없는 듯 유진의 곁에 배경처럼 존재하며 집을 지킨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난다는 메모를 남겨둔 채 집을 나간 엄마로봇. 갑작스러운 그녀의 가출에
    짚이는 구석이 있던 유진은 곧장 선배 오 덕훈(남 30)에게 전화를 걸어 로봇을 내놓으라
    다짜고짜 화를 낸다. 한 달 전... 유진은 우연한 계기로 덕훈의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덕훈이 로봇 페티쉬가 있으며 오랫동안 유진의 엄마로봇을 스토킹한 것을 알게 된 유진,
    그날 이후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며칠 후… 유진은 경찰서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는다. 엄마로봇이 살인 혐의로 조사 중에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오 덕훈으로 숨진 채 차에서 발견되었고 엄마로봇이 오 덕훈의
    차 안에서 나오는 게 CCTV에 잡혔다. 현재 엄마로봇은 행방불명으로 추적 중이며 조사 후
    혐의가 밝혀지면 AI 과실치사로 소유주가 대신 실형을 치러야 한다, 말하는 강 형사. (남 49)
    덧붙여... 모친 송 영아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알고 보니 로봇의 실소유주는 유진이
    아닌 모친 송 영아로 등록되어 있었다. 강 형사의 질문에 유진은 답하지 못한다.
    유진에게 모친은 과거에 말없이 떠나 연락 한 번 없는 무정한 여자일 뿐이다.

    참고인 조사 후, 집으로 돌아온 유진은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했던 날들의 기억을 하나둘
    회상하기 시작한다. '위암이던 아빠를 간호하던 엄마... 투병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는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입지 않던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배우고
    유진과 많은 시간을 웃으며 보냈다. 아직도 그때는 유진에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행복했던 날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아무 징조도 없이 엄마는 떠나버렸다.
    왜 나를 버린 걸까?' 엄마의 가출은 여전히 유진에게 의문과 상처로 남아 있다.

    한편, 행방불명이던 엄마로봇은 지나가던 홀아비 트럭 운전사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살다가
    노모의 심기를 건드려 대판 싸우고 만다. 화가 난 노모는 엄마로봇을 경찰에 신고하고
    송치된다. 정확한 살해 혐의 분석을 위해 분해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엄마로봇.
    분해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유진과 대화를 나누며 둘은 작별한다.
    본격적으로 강 형사와 조사관은 엄마로봇을 분해하여 명확한 증거를 찾고 살해 동기 분석에
    나선다. 조사관은 엄마로봇 안에 프로그램 데이터로 남아있는 송 영아의 일상을 담은 영상을 발견하게 된다.

    암 투병에 지쳐 세상을 뜨고 싶어 했던 남편과 그런 그의 뜻을 용납하지 못했던 송 영아. 남편은 결국 상태가 악화하여 뇌사에 이르렀고 결국 송 영아가 제 손으로 남편의 호흡기를 떼냈다. 이런 송 영아의 메모리 영상기록을 토대로 자가해석하여 행동한 엄마로봇은 평소 우울증과 자살 시도를 해오던 오 덕훈을 도와준다는 명목하에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강 형사는 송 영아를 체포하기 위해 그녀의 계좌와 의료기록을 뒤져가며 사라진 송 영아의 행적을 추적해나간다. 한편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엄마가 머물던 방 정리를 하던 유진은 엄마의 노트를 발견하게 되며 갑작스레 떠난 그녀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이다은

    이다은

    1991년생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 영상시나리오학과 졸업

  •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이정향 영화감독

    이번 심사는 작년에 비해 읽는 재미가 쏠쏠한 시나리오가 많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은 비슷한 쟝르의 범람속에서 좀 다른 이야기와 소재를 찾고 싶었습니다. 영화 현장에서 관객들과 마주한 제작 현실은 그런 갈증을 심하게 부릅니다. 심사위원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했냐며 먼저 서로의 의견을 물어봅니다. 조금이라도 늦게 매를 맞겠다는 심정이랄까요. 동시에 당선작으로 <엄마로봇>을 언급하면서 보는 눈은 비슷하다며 하하호호합니다.

    AI 소재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엄마로봇>은 휴먼 SF 드라마입니다. SF 코드와 관습적인 시큰한 짠내 이야기가 만났습니다. 이질적인 설정이 조화롭게 직조되며 사라진 엄마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읽다보면 가장 저렴한 제작비로 제작 가능한 SF 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이듭니다. 한계도 명확해보입니다. 진짜 엄마가 사라지며 '엄마로봇'의 등,퇴장의 개연성을 해결하고, 아쉬운 엔딩을 더 파고 들어야합니다. 상업영화 시나리오로서 충분한 매력을 갖춰야 제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엄마로봇>은 주제도 좋고 잘 쓴 시나리오입니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작가의 필력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합니다.

    이번 공모전에서 선택받지 못했지만 뭔가 다른, 썸딩뉴가 있는 시나리오를 써보겠다는 작가의 야심과 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나리오도 있었습니다. 판타지 심리극 <심장의 무게>를 두고 심사위원은 끝까지 저울질했습니다. 그만큼 <심장의 무게>에 대한 미련이 남습니다. 제주도 사투리 대사의 가독성과 심장 이식에 대한 개연성만 해결해도 좋은 시나리오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인과응보 미스터리 <검은 저수지>는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를 제대로 갖춘 시나리오입니다. 공포로 방향을 틀어서 각색해 보는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닥터 사냥꾼>은 주인공의 초능력없이 리얼한 의료과실 스릴러로 탄탄하게 가는게 좋겠습니다. 여성 일탈 드라마 <선애와 미순>은 쎈 캐릭터와 자극적 대사를 절제하면서 이야기를 먼저 정리하는게 좋겠습니다.

    다섯편 모두 멘토링과 더불어 개발하다보면 임자를 만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시나리오의 최종 목표는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시나리오 당선만으로 자족한다면 작가의 직무유기입니다. 시나리오는 출판물로 관객과 만나는게 아니라 꼭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나야 완성되는 선텍스트입니다. 당선작이 극장에서 한편의 영화로 관객과 만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 이다은

    이다은

    1991년생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 영상시나리오학과 졸업

    동아일보 전화를 받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일을 마친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며 엄마와 부둥켜안고 한바탕 울었는데 그 때의 엄마 뺨이 차갑고 축축했습니다. 그 감촉이 생경했고 여전히 생각나며 자꾸 되새기니 죄송한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해 글 쓴다고 방안에 틀어박혀선 계절가전을 팍팍 돌리며 온갖 열을 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나는 혼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한기를 느끼며 엄마로봇을 썼습니다.
    엄마 아빠와 내가 지닌 온도는 항상 정반대였고 그게 불만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안에 틀어박힌 딸을 위해 묵묵히 밖에 계셨던 두 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다 큰 딸을 항상 인내하며 지켜보아 주시는 하나님과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조금은 제 몫을 한 것 같아 안도감이 듭니다.

    투박하고 모난 이야기를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용기를 잃지 않고 끈질기게 써나가겠습니다.
    끈질김이 이야기에 스며 활력이 되고 주저앉은 누군가의 마음에 동력이 되며
    그 동력이 다시 제게 닿는 선순환을 꿈꾸며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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