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선인장 키우기

by  조지민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등장인물 준희, 김, 선생, 경비, 스쿠아

    때 늦봄에서 초여름.
    무대 어느 고등학교. 교실이기도 하고 복도와 옥상이 되기도 한다. 후면의 벽은 영상을 비춰보는 스크린이 된다.




    1장

    명전. 준희, 관객들을 향해 서 있다.



    준희 사람들은 저를 코피노라고 부릅니다. 코리안과 필리피노의 합성어,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이르는 말이죠. 그런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사이) 그래서 저는 언제나 코피노였습니다. 제가 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많이들 궁금해 하시겠지만, 아빠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빠는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저희를 떠났거든요. 엄마는 아빠가 사라졌다고만 했습니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엄마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요? 어쩌면 아빠는 우리를 잊어버렸거나 잊어버린 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저의 추측일 뿐이지만요. 그게 어떻게 됐든, 저에게 남은 건 코피노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사이) 제가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숨을 쉬는 동안, 저는 코피노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어릴 때 꿈이 세 개나 있었는데, 소방관과 공룡과 비행기가 동시에 되고 싶어 했대요. 제가 코피노로 보이나요? 제 이름은 뭘까요?



    암전.



    2장

    학교 종소리 들리고 명전. 빗소리와 함께 무대 후면에는 비 내리는 영상이 비친다. 책걸상 두 개가 측면을 향해 일렬로 있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준희. 멀리서 김이 축구 하는 소리 들린다. 세게 공 차는 소리 들리고, 무대 위로 축구공이 날아온다.



    김(소리) 어어!



    김, 뛰어 등장한다. 그런 김을 쳐다보는 준희. 준희에게로 굴러오는 축구공. 김, 준희를 발견하고 놀라 멈춘다.



    김 (어색한) 미안. (얼른 축구공을 주워든다) 내가 방해했지? 미안해.

    준희 …괜찮아.

    김 (안절부절못한다)

    준희 괜찮아. 가봐.

    김 어, 그래. (돌아가다 말고 축구공을 들어 보이며) 혹시 너도 같이 할래?

    준희 복도에서 공 차면 안 되는데.

    김 아, 그렇지. 갑자기 밖에 비가 와서.

    준희 ….

    김 음… 무슨 책 읽어? (준희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하하, 나는 봐도 잘 모르겠다. 역시 1등이라 그런가.

    준희 이거 읽는다고 1등하는 건 아닌데.

    김 아…. 근데 우리, 같은 반인데 이렇게 얘기하는 건 처음인 거 같네.

    준희 (고개를 끄덕인다)

    김 넌 왜 맨날 집에 안 가고 학교에 있어?

    준희 ?

    김 아니, 축구 하고 올라오면 항상 있더라고.

    준희 넌 왜 맨날 혼자 축구 하는데?

    김 봤어? 그야, 애들은 다 학원 가니까.

    준희 넌 안 가?

    김 응.

    준희 나도 그래.

    김 …혹시 나도 같이 공부해도 돼? 나 공부 좀 가르쳐주라. 너 공부 되게 잘하잖아. 방해 안 할게!

    준희 ….

    김 넌 필요한 거 없어? 나도 도와줄게!

    준희 그런 거 없는데.

    김 나 공부 빼고 다른 건 다 잘해. (축구공으로 묘기를 보여준다)

    준희 ….

    김 (머쓱한) 생각해봐. 그리고 그 책 다 읽으면 나도 빌려줘. 나도 읽어보게!

    준희 (고개를 끄덕인다)

    김 근데 우산도 없는데 집엔 어떻게 가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

    준희 난 있는데.

    김 (당황한) 있어?

    준희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 온다고….

    김 아, 일기예보….

    준희 …같이 쓸래?

    김 ?



    김이 활짝 웃자 준희도 슬며시 웃는다. 암전.



    3장

    명전. 김, 한 손에는 축구공을 들고, 준희를 무대 가운데로 이끈다. 준희, 못내 이끌려 간다.



    김 자, 여기 서봐. (준희와 마주보고 선다) 내가 여기서 던질 테니까 한번 받아봐.



    김, 준희를 향해 포물선으로 공을 던진다. 준희가 공을 뻥 차버리자 멀리 날아가는 공.



    김 (할 말을 잃은) 야, 너…. (어이없어 웃어버린다)

    준희 (민망한) 내가 주워올게.

    김 아냐, 됐어. 내가 갈게. 넌 여기 있어. (공을 주워오며) 다시 해보자. 발끝이 아니라 발등으로 차는 거야. 너무 세게 차지는 말고, 눈높이 정도 띄운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는 준희. 김, 공을 던지고, 준희가 다시 공을 찬다. 빗맞아 옆으로 튀는 축구공.



    김 (공을 줍는다) 시선은 (축구공을 들어 보이며) 여기. 끝까지 공을 봐야 해. 다시!



    김, 다시 공을 던지고, 준희가 받아 차는데



    경비(소리) 또 너희냐?



    경비, 등장한다. 굴러가는 공을 얼른 잡아 등 뒤로 숨기는 김.



    경비 이 시간까지 뭐 하고 있어? 집에 안 가고.

    김 헤헤. 학생이 공부하지 뭘 하겠어요.

    경비 무슨 꿍꿍이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너넨 어떻게 된 애들이 맨날 학교에 붙어 있어?

    김 저희가 학교 아니면 어딜 가요.

    경비 (열쇠 꾸러미를 김에게 던지며) 문 잘 잠그고, 알지?

    김 (익숙한 듯 날아오는 열쇠를 안정적으로 잡고) 경비실 문 밑으로 넣어놓으면 되죠?

    경비 (퇴장하며) 괜한 일로 깨우지 말고. (뒤돌아 둘을 번갈아 보고) 성가신 일 만들지 마라!

    김 (경례 자세로) 네! 들어가세요.



    경비, 퇴장한다. 경비를 향해 꾸벅 인사하는 김. 그사이 준희, 자리에 앉아 책을 편다.



    김 야, 연습 더 해야지. 수행평가 얼마 안 남았잖아.

    준희 됐어. 그만 할래.

    김 안 돼도 그냥 해보는 게 중요한 거야. 계속 하다보면 된다니까?



    김, 준희 뒷자리에 앉는다. 개의치 않고 책을 보는 준희.김, 준희 뒤에서 기웃거리지만 준희는 미동도 없다. 김은 심드렁하게 딴짓을 하다 대뜸 준희의 등을 꾹꾹 찌른다.



    김 너 진학 희망 조사서는 냈어? 시험 끝나고부터 상담한다던데.

    준희 아니.

    김 그럼 무슨 과 갈진 정했어?

    준희 아니.

    김 너 내가 말 거는 거 귀찮아서 그러는 거지?

    준희 아니. 딱히 생각해보질 않아서.

    김 하긴 네 성적이면 상담할 것도 없겠다. 희망이 없는 내가 문제지.

    준희 대학 간다고 안 했는데.

    김 어? 너 대학 안 가?

    준희 안 간다고도 안 했어.

    김 뭐야. 그럼 졸업하고 뭐 할 건데.

    준희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든다) 출가?

    김 ….

    준희 ?

    김 그냥 하던 것 마저 해.



    준희는 다시 책을 읽는다. 김, 축구공으로 리프팅 연습을 한다. 그러다 금세 지루해져 뺨을 책상에 대고 눕는다.



    준희 공부 안 할 거면 집에 가지?

    김 (벌떡 일어나) 나? 내가 무슨 공부를 안 한다고 그래. 마침 모르는 문제가 생겨서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급히 문제집을 펼쳐 들고 준희 앞으로 간다. 문제집을 준희의 책상에 내려놓고) 이거, 네가 좀 가르쳐줘. 이런 문제 내는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 사람이 풀 수 있는 걸 내야지. 솔직히 너도 어렵지? 나만 어려운 거 아니지?

    준희 ….

    김 진짜야? 너도 몰라? (눈치 보고) 왜?

    준희 이거 어제 물어본 거야.

    김 (문제를 확인하고 당황한) 아아! 맞아! 어제 그 문제! 아무리 생각해봐도 또 모르겠다니까. 다, 다시 알려줘.

    준희 (공책을 펼쳐 풀이를 쓴다)

    김 (준희를 지그시 바라보다) 너는 무슨 과목 제일 좋아해?

    준희 과학.

    김 왜?

    준희 재밌으니까.

    김 넌 진짜 이상해. 항상 내 예상을 비껴간단 말이야…. 나한텐 안 물어봐?

    준희 뭘?

    김 기브 앤 테이크. 내가 물어봤는데 너도 나한테 물어봐야지.

    준희 …….

    김 나는, 체육? 아니다, 음악인가?

    준희 (김의 문제집을 덮는다)

    김 왜?

    준희 내일도 물어볼 거잖아. 집에 갈 시간이야.

    김 벌써 그렇게 됐나? (속없이 웃는다)



    가방을 챙겨 나가는 김과 준희.



    김 근데 대체 네가 읽고 있는 건 뭐야?

    준희 상대성이론에 관한 건데, 너도 읽어볼래?

    김 아니. 절대 아니. 친구야, 넌 날 몰라도 너어무 몰라.



    두 사람의 목소리 점점 작아지면서 암전.



    4장

    명전. 김의 책상에 손바닥만 한 선인장 화분이 있다. 분무기로 화분에 물을 뿌리는 김. 준희, 등장한다.



    준희 웬 선인장?

    김 나 드디어 꿈이 생겼어.

    준희 꿈?

    김 그래, 꿈. 과학자가 되려고.

    준희 (피식 웃고 자리에 앉는다)

    김 농담 아니야. 내가 네 덕분에 과학의 세계에 눈을 떴지.

    준희 좀 더 일찍 떴으면 좋았을 텐데.

    김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야. (비장하게 일어서서) 생명의 신비란! 놀랍지 않아?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게? 단세포생물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화해온 과정을 생각해봐. 난 좀 무섭기까지 하다니까.

    준희 놀랍게도 다음 주가 시험이란 사실이 더 무섭지 않니? 과학자가 되려면 할 일이 참 많을 거 같은데.

    김 이것도 다 공부야. 일종의 실험이랄까. 이론보다 실전이 중요한 거라고. (책상 위에 올라앉아 화분에 물을 더 뿌린다) 너 어렸을 때 필리핀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필리핀에도 선인장이 있어?

    준희 기억은 안 나는데, 있겠지? 웬만해선 잘 살아남으니까.

    김 이거 잘 기르면 꽃도 핀대.

    준희 그래?

    김 필리핀어로 선인장이 뭐야?

    준희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김 꽃은? 꽃은 뭐라고 하는데?

    준희 불락락.

    김 불락락? 그건 너무 예상 밖인데.

    준희 뭘 기대한 거야.

    김 불락락은 아닐 줄 알았어. 꽃. 불락락. 플라워. 같은 꽃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 다르지?

    준희 당연하지.

    김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데, 꽃은 어떻게 꽃이 됐을까? 꽃이랑 꽃이라는 단어는 아무 상관없잖아.

    준희 언어는 계속 변해. 나중엔 꽃이 꽃이 아닐 수도 있어.

    김 한… 몇 만 년 정도 지나면 우리가 쓰는 말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말이 아닌 다른 걸 사용할지도 몰라. 언어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잖아!

    준희 그때까지 인류가 살아 있긴 할까?



    사이.



    김 좋아, 불락락! 마음에 들어! 내가 불락락 꼭 보고 만다. 나랑 내기할래? 꽃이 필지 안 필지?

    준희 왜 내가 안 핀다에 걸 거라고 생각해?

    김 응? 그럼 내가 안 핀다에 걸어?

    준희 안 피게 할 거야?

    김 아니지! 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안 핀다에 걸어야지!

    준희 (웃으며) 알았어. 잘 키워봐.

    김 넌 너무 매정해. 솔직히 나보다 체육 창고에 사는 그 고양이가 더 좋지? 체육도 싫어하는 네가 어쩐지 맨날 체육창고에 붙어 있더라니.

    준희 고양이는 싫을 이유가 없잖아.

    김 걘 어떻게 됐어? 아픈 거 같더니.

    준희 새끼 낳았어.

    김 임신한 거였어? 먹을 거라도 가져다줘야 하나.

    준희 사라졌어.

    김 어디로?

    준희 모르지. 길고양이잖아.

    김 그때 그냥 데려갈걸.

    준희 걔는 거기 사는 애야. 함부로 데려가면 안 돼.

    김 (화분을 손에 올려놓고 보면서) 내 생각엔 동물은 식물보다 더 살기 어려운 거 같아.

    준희 왜?

    김 그렇지 않아? 필요한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훨씬 복잡하게 살잖아.

    준희 식물이라고 쉬울까? 식물도 감정이 있어.

    김 식물이?

    준희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아카시아 나무는 동물한테 잎을 뜯어 먹히면 탄닌을 내뿜는대. 이 탄닌이 주변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에 닿으면, 동물이 소화하기 힘든 성분을 만든다는 거야. 그럼 동물들이 결국 다른 이파리를 먹을 수 없게 되는 거지.

    김 그것도 의사소통인가?

    준희 아카시아 나무에겐 그렇지.

    김 내 말도 얘한테 들릴까?

    준희 (원상태로 돌아앉으며 책을 꺼낸다) 식물이 사람의 말에 반응한다는 연구도 많아.

    김 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배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지?

    준희 눈이 안 보이는 사람도 빠르게 움직이는 빛을 감지할 수 있대.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보는 거지.

    김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화분에 물을 뿌린다)

    준희 물 너무 많이 주면 죽는다.

    김 귀신같긴. 넌 뒤에도 눈이 달렸냐? 아님 너도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준희의 뒤통수에 대고 손바닥을 흔든다) 나도 알아. 근데 보고 있으면 자꾸 더 주고 싶어져.

    준희 선인장의 생사가 네 손에 달린 거야.

    김 뭘 또 그렇게 무섭게 얘기해. (선인장 줄기를 가리키며) 너, 여기 뚱뚱한 부분이 줄기인 거 알아? 그래서 이 끝에 꽃이 핀대. 난 한 번도 여기가 줄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보통 줄기는 가늘잖아.

    준희 그렇지.

    김 식물에 줄기가 있는 건 당연한데, 왜 이게 선인장 줄기라고 생각은 못 했을까?

    준희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잖아. 이누이트 언어에는 다른 언어들에 비해서 눈에 대한 언어가 많대. 그러니까 우리보다 눈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겠지. 그럼 똑같은 눈을 보고도 그들에겐 보이는 게 우린한테는 안 보일 테고.

    김 아,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거 같아. (의자를 끌어와 준희 앞에 앉는다) 그런 거 있잖아. 이건 너도 못 풀 걸? 들어봐. 네가 A한테 500원, B한테 500원을 빌렸어.

    준희 내가?

    김 만약에 말이야.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얼마야?

    준희 1000원.

    김 그 1000원으로 슈퍼에 가서 970원짜리 과자를 샀어.

    준희 (고개를 끄덕인다)

    김 그리고 남은 30원에서 A랑 B한테 10원씩 돌려준 거야. 나머지 10원은 네가 가졌어. 그럼 A, B한테 490원씩 빚을 졌지. 490원 더하기 490원은 980원. 맞지?

    준희 응.

    김 근데 넌 10원을 가졌잖아. 490원 더하기 490원 더하기 10원은?

    준희 990원?

    김 그럼 10원은 어디 갔어?

    준희 응?

    김 10원이 없잖아. 원래 1000원이었는데 10원 어디 갔어!

    준희 (암산하며 중얼거린다)

    김 (통쾌한) 모르겠지? 10원이 없어졌어!

    준희 식이 잘못됐잖아.

    김 뭐?

    준희 A, B한테 진 빚이 980원인데, 내가 가진 과자 970원이랑 남은 10원을 더하면 980원, 맞잖아.

    김 그게 무슨 말이야? 원래 1000원이잖아. 그럼 20원은?

    준희 A, B한테 돌려줬잖아.

    김 뭐? 빚이 980원이고, 20원이…. 아니야! 490원 더하기 490원에 10원을 더하면….

    준희 거기 10원을 더하면 안 되지.

    김 그럼 뭐가 잘못된 거야?

    준희 돈은 그대로야.

    김 그럴 리가 없어! 다른 애들도 다 못 풀었는데!

    준희 그냥 속은 거야.

    김 말도 안 돼. 잠시만. (손가락을 접으면서) 490원에 490원을 더하고…. (계속해서 암산을 시도한다)

    준희 (김을 보며 웃는) 생각보다 쉽게 꽃이 필지도 모르겠다.



    암전.



    5장

    명전. 두 책걸상, 정면을 향해 있고, 김과 준희가 앉아 있다. 준희, 종이에다 무언가 쓰고 있다. 반면 집중하지 못하는 김. 그 옆에 서 있는 선생.



    선생 너네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아? 범죄야, 범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괜히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사실대로 실토해.

    김 저희가 그런 거 아니에요.

    선생 (김을 노려보며) 이럴 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뻗댄다고 해결이 되는 줄 알아? (선인장 화분은 보고) 이건 뭐야? 대체 학교엔 뭘 하러 오는 건지. (준희에게) 너는 어머니 모셔오라니까 왜 소식이 없어?



    준희, 말없이 굳은 얼굴로 선생을 본다.



    선생 (혀를 찬다) 간도 크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여?

    경비(소리) 선생님!

    선생 아, 저기 오시네.



    경비, 등장한다. 선생이 경비에게 눈을 돌린 사이 김은 입을 비죽거리며 화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어서 글을 쓰는 준희.



    경비 아이고, 죄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선생 그러게 말입니다.

    경비 (준희와 김을 보고) 맞아요! 얘네들! 맨날 학교에 남아서 서성이는 게 저도 뭔가 수상하다 했거든요. 이 녀석들아! 내가 얌전히 공부하라고 했지 누가 이런 사고를 치래?

    선생 대체 문단속을 어떻게 하셨길래 시험지가 유출될 수가 있어요?

    경비 아유, 제가 늘 그런 게 아니고, 그날따라 얘들이 하도 졸라대기에 저도 어쩔 수 없이….

    김 저희가 언제 그랬어요!

    선생 넌 조용히 하고 어서 경위서나 써! 언제, 어디서, 뭘 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김 (시무룩해져서 펜을 끄적거린다)

    경비 선생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요즘엔 학생들한테 말 한 마디도 함부로 못하는 거.

    선생 그래도 그렇지. 학교에는 규율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요즘 애들은 우리 때 같지 않다니까요.

    경비 저는 얘들이 어디 갈 데도 없는 것 같고, 자식처럼 생각하다보니 또 마음이 쓰이고….

    선생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어쩐단 말입니까. 이 사실을 교육청이나 다른 학부모들까지 알게 되면!

    경비 알게 되면?

    선생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이 문제에 한두 사람이 달린 게 아닙니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죠?

    경비 아유, 그럼요.

    선생 (김과 준희에게) 너흰 조만간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거니까 잘 생각해서 쓰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너희 미래가 바뀔 수도 있어. 괜히 애먼 사람한테까지 피해주지 말고.



    선생, 퇴장한다.



    경비 내가 좋게 좋게 봐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하여튼 잘못되기만 해 봐.



    경비, 선생 뒤를 따라 퇴장한다. 김, 선생과 경비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자 바로 펜을 내려놓는다.



    김 뭐 쓸 게 있어야 쓰지. (준희에게) 야,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쓰고 있어?

    준희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김 할 수 있긴 개뿔. (자신의 경위서를 들어 흔들며) 이걸로? (경위서를 허공에 던져버린다) 이게 말이 돼? 우리가 시험지를 왜 훔쳐? 무슨 학교가 이래? 증거도 없이 학생을 이렇게 몰아세워도 되는 거야? 쓰란 대로 안 쓰면 어떻게 할 건데?

    준희 …….

    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우리가 그 학원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시험지를 훔쳐다 주냐?

    준희 돈을 받았다잖아.

    김 돈이라도 받았으면 덜 억울하지. 어디 찾아보라 그래. 진짜 답답해 죽겠네.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한 게 죄야? 학교에 남아 있었다는 게 무슨 증거가 돼?

    준희 누군가 증거가 되게 만든 거지.

    김 누군가? 근데 왜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준희 제일 쉽잖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김을 흘끗 보더니 책상 앞으로 나온다) 따라 해봐. (제자리에서 힘껏 뛴다) 해보라니까?



    준희, 김의 손을 잡고 다시 힘껏 뛴다. 얼떨결에 같이 뛰는 김.



    김 이게 뭔데?

    준희 실험! 우리가 공중에 있었던 게 몇 초나 될까? 1초?

    김 아마, 그쯤?

    준희 (자리에 가 책을 펴고 무언가를 찾는다) 서울에서 자전축까지가 5111킬로미터, 하루에 지구가 한 바퀴를 돌면, 우리는 32097킬로미터를 움직이는 거야. 우리가 뛴 1초 동안 이 땅이 371미터나 움직인 거라고!

    김 뭐?

    준희 자, 여기 누워봐.



    준희, 바닥에 귀를 대고 눕는다. 김, 준희를 따라 눕는다. 준희, 눈을 감고 집중한다.



    준희 뭐가 들려?

    김 뭐가?

    준희 뭐가 느껴져?

    김 뭐가?

    준희 지구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냐고. 지구의 자전, 맨틀의 대류, 지각 판 이동 그런 거!

    김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고) 그런 게 느껴질 리가 없잖아.

    준희 (일어나서) 그러니까.

    김 그러니까, 라니?

    준희 그렇게 당연한 것도 난 지금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잖아.

    김 (어이없는) 그래서? 이대로 징계를 받는다고? 넌 화도 안 나?

    준희 생각보단 화가 나.

    김 생각보단?

    준희 그래서 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중이야. (경위서를 훑어 읽고는 책상에 엎어놓는다) 근데 마땅한 답이 없네.

    김 (크게 한숨을 내뱉고) 지금도 지구가 돌고, (바닥을 두드리고) 이 땅도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준희 그렇겠지.

    김 너 지진을 느껴 본 적 있어?

    준희 너무 오래 전이라….

    김 몇 년 전에 지진 났던 적 있잖아. 집에 있는데 갑자기 아파트가 휘청하는 거야. 근데,

    준희 근데?

    김 아무 일도 없었어! 지진이 일어났는데.



    준희,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김 재난 영화에서 보면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그러잖아.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한 거야. 순간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싶었어. 내가 방금 느낀 게 착각인가? 나만 느낀 걸까? 근데 뉴스에서 지진이 났다고 하더라고. 뉴스에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난 그게 지진인지도 몰랐을 거야.

    준희 약한 지진이었나 보지. 아니면 아주 멀리서 일어났거나.

    김 내가 모르고 지나간 지진이 얼마나 많을까? 어떤 생명체들은 나보다 더 많은 지진을 느끼겠지?

    준희 그럴지도. 인간이 알아채기 전에 미리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물들도 있잖아.

    김 개미들이 줄 지어 가고 그런 거?

    준희 응.

    김 그날 내가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면 난 내 뇌가 어떻게 됐거나 신의 장난에 걸려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지진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강도는 얼마나 센지 그걸 측정해주는 관측소나 뉴스가 없다면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살겠지?

    준희 알기 어렵긴 하겠지.

    김 (헛웃음치고) 세상엔 참 이상한 일이 많은 것 같아.



    사이.



    준희 난 어릴 때 건물이 무너져서 이틀 동안 갇힌 적이 있어. 알고 보니 그게 지진 때문이었대.

    김 이틀이나?

    준희 사실 이틀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김 거기서 어떻게 버텼는데?

    준희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더 있었어.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남자가 서 있다. 준희와 남자, 서로를 마주보고 선다.



    김 그 사람이 누군데?

    준희 몰라. 기억이 안 나. 어두웠거든. 전기도 끊겼으니까. 목소리는 낮고, 대략 체격은… (남자의 키만큼 손을 올린다) 이 정도? 그렇게 크진 않았던 것 같아.

    남자 얘, 머리 숙여!



    남자, 황급히 준희의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다. 남자와 준희, 좁은 곳에 갇힌 듯 몸을 웅크린다. 남자, 길을 찾는 듯 두리번거린다. 준희가 머리를 들려고 하자 준희 머리를 누른다.



    남자 안 되겠다. 여기서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준희 (어린 아이 같은) 여기서요?

    남자 괜히 움직이다간 다치겠어.

    준희 사람들이 안 오면요?

    남자 올 거야. 분명히. 우릴 찾을 거야.

    준희 언제 오는데요?

    남자 금방. 금방 올 거야.

    김 그렇게 이틀이나 있었단 말이야?

    준희 그게 이틀이었는지 2주였는지 아님 두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해주는 얘기를 듣는데 정신이 팔려버렸거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남자 너 스쿠아라고 아니?

    준희 그 사람이 스쿠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는데,

    김 스쿠아?

    준희 (흥미롭다는 듯) 도둑갈매기 말이야.

    김 도둑갈매기?

    남자 스쿠아는 남극에 사는 바닷새지. 재밌는 건 도둑갈매기라고 불린다는 거야. 알을 품고 있는 펭귄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잠시 펭귄이 방심한 틈을 타서 펭귄의 알을 훔쳐 먹는 거지.

    준희 난 그 얘기에 홀려버렸어. 계속 더 얘기해달라고 졸랐지. 펭귄의 알을요?

    남자 그래. 펭귄들은 무리를 지어 사는데, 꼭 한두 마리씩 불침번을 세워. 알을 지키려고 말이야. 꽤 똑똑하지?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세상이 다 그래. 자기 걸 지키지 않으면 빼앗기고 말아.

    준희 안 뺏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남자 음…. 안 뺏기는 법을 익혀야지. 소중한 걸 지키는 법.

    준희 소중한 걸 지키는 법…. (사이) 난 그 사람이 날 구해준 사람인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고.



    남자를 향해 있던 스포트라이트 꺼진다.



    김 그럼?

    준희 엄마 말론 그런 사람은 없었대. 무너진 건물 안에서 발견된 건 나뿐이었대.

    김 너뿐이었다고?

    준희 그래.

    김 그럼 네 기억 속에 있는 그 사람은 누군데?

    준희 글쎄. 누구였을까? 분명히 내 기억 속엔 있는데.

    김 꿈일까?

    준희 아니. 꿈이 아니었어. 분명히.

    김 그럼 다른 기억이랑 헷갈리는 거 아닐까? 또 다른 기억은 없어?

    준희 응. 근데 엄만 그 얘길 싫어했어. 그 놈의 갈매기 얘기 좀 그만하라고 했지. 엄밀히 따지면 갈매기와 도둑갈매기는 다르지만, 엄마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어. 물론 엄마가 싫어하는 게 그것만이었던 건 아니지만.

    김 또 뭐가 있는데?

    준희 공룡 이름 외우기, 만화 주제가 따라 부르기, 판박이 스티커 모으기, 그런 거.

    김 모범생도 어릴 땐 다 똑같구나?

    준희 아무튼 그 얘기만큼은 사진처럼 계속 기억에 남아 있었어. 언제 꺼내 봐도 똑같이 선명하게. 엄마는 이제 내가 잊어버린 줄 알겠지만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나. 나한테 그 얘길 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김 그런데… 도둑갈매기가 우리말을 알아듣는다면 너무 황당하지 않을까?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뒷짐을 지고 당당하게 서 있는 스쿠아. 김과 준희, 스쿠아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스쿠아의 움직임에 따라 스포트라이트가 움직인다.



    스쿠아 (격앙된) 도둑갈매기라고 하셨습니까? 도둑이라니요? 제가요? 제 이름이 그렇단 말입니까? (마치 발레 같은 몸짓으로 자신을 뽐내며) 이 우아한 깃털, 단단한 근육과 용맹한 눈빛, 그리고 극지방의 세찬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종족에게 도둑이라니요? 그 말은 즉, 염치없이 몇 날 며칠 자리를 깔고 카메라를 들이대던 놈들이 사실 전 세계 인간들이 보는 방송에 우리들을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처럼) 저기 도둑갈매기들이 보이는군요. 펭귄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펭귄 알을 훔쳐 먹는 아주 교활한 녀석들이지요. (다시 원래 목소리로) 이렇게 소개한단 말입니까? 남극의 생태를 다룬 과학 잡지 같은 데선 거창하게 펭귄 따위를 표지에 장식해놓고는 잡지가 거의 끝나갈 때쯤 어디 귀퉁이에다 저를 펭귄의 천적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겠죠. 그뿐입니까? 그걸 본 인간들은 어머, 너무 잔인해! 어떻게 귀여운 펭귄의 알을 먹어버릴 수가 있어! 하며 우릴 비난하겠죠. 그들은 우리를 고작 어린 인간들의 영웅인 펭귄을 괴롭히는 악당, 엑스트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참나, 펭귄들이 얼마나 많은 크릴을 잡아먹는지 아십니까? (발을 들어 보이며) 이 발톱보다도 작은 아이들을 말이에요. 심지어 인간들은 크릴을 바늘에 꿰어 미끼삼아 낚시를 즐기죠. 그런데 그런 크릴을 불쌍히 여기는 이가 있습니까?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 수많은 크릴들의 영혼이 이미 가득 차 있을 겁니다. 대체 도둑 같은 놈들이 누군데 (김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우리 보고 도둑이라는 겁니까?

    김 (스쿠아의 기세에 밀려 점점 물러난다) 아니, 제가 그런 건 아니고….

    스쿠아 그러는 인간들이 하는 짓을 보세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 감옥 같은 닭장에 닭들을 빽빽하게 가둬놓고 매일 알만 쏙쏙 빼가지 않습니까? 그 닭들은 평생 인간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죽는 거라고요. 인간들은 지구를 자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몇 억 년 후에 보면 인간 화석 보단 닭 화석이 훨씬 많이 남아 있을 겁니다. 기나긴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들도 그저 한순간일 뿐이란 겁니다.



    김이 스쿠아의 어깨를 토닥이려 하자 스쿠아가 김의 손을 내친다. 계속해서 관객을 향해 말을 이어가는 스쿠아.



    스쿠아 아니, 내가 말이 안 통하니 얼마나 답답했던지. 하여간 인간들은 민폐덩어리라니까요. 하루라도 지구에 폐를 끼치지 않는 날이 없어요. 숨 쉬는 내내 쓰레기만 만들어낼 뿐이죠. 그러면서 자기들이 지구의 구세주라도 되는 양 오만을 떨어대는 꼴이라니. 착각하지 말라고요. 지금껏 우리가 얼마나 많은 멸종을 지켜봤는지 아십니까? 언제나 그랬듯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도 우리 조류들이 지켜보게 될 겁니다.



    스쿠아를 향해 있던 스포트라이트가 꺼진다.



    김 …할 말이 많았나본데?

    준희 그러게. 인류세의 지표화석이 인간이 아니라 닭이라는 데엔 일리가 있어.

    김 인류세?

    준희 우리가 살고 있는 신생대 제4기는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나뉘는데, 이제 홀로세를 지나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가 도래했다고 보는 거야. 인류가 저질러온 환경 파괴의 대가를 치러야 할 시대가 온 거지. 지구온난화나 엘리뇨 같은 거 말이야.

    김 도둑갈매기 입장에서는 지구온난화도, 도둑갈매기라는 이름도 억울할 만 해.

    준희 어쩌다 플라스틱 조각이 목에 걸려 죽는다면 더 그렇겠지.

    김 지금 우리처럼?



    김과 준희, 서로를 보고 웃는다. 암전.



    6장

    명전. 선생,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준희, 대걸레를 들고 등장한다. 선생을 발견하고 멈춰서는 준희.



    선생 (굽신거리는) 예, 알겠습니다. (사이) 아닙니다. 괜히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걔네도 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문제없도록 조용히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이) 예, 들어가십시오. 예. 예. (전화를 끊고 중얼거리는) 자기들은 시키기만 하면 되지만 나는 대체 어쩌란 거야? 여기저기 비위 맞추다 나만 죽어나겠… (준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어휴, 깜짝이야! 뭐야, 너?



    준희, 목례한다.



    선생 거기서 뭐해?

    준희 (대걸레를 들어 보이며) 청소 당번이라.

    선생 너는…! (뭔가 말하려다 만다) 청소를 빨리빨리 해야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준희 ….

    선생 (말을 삼키고) 됐다. (고개를 저으며 퇴장하다 멈춰 선다) 아니, 너 말이야.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은 줄 알아? 하마터면 너희 대학이고 뭐고 고등학교도 못 나올 뻔했어.

    준희 ….

    선생 이번만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으니까 다행인 줄 알아.

    준희 네? 왜요?

    선생 왜요는 무슨 왜요야? 일 크게 만들어봤자 학교 이름에 먹칠이나 하고, 너희 앞길 막는 거밖에 더 돼? 너 내신 한 번 망치면 타격이 얼마나 큰지 몰라? 집안 사정 생각하면 장학금도 받아야 할 것 아니야? 너 하나 의대 보내려고 학교에서도 얼마나 신경들을 쓰시는지.

    준희 저 의대 갈 생각 없는데요?

    선생 이게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네 성적에 의대를 왜 안 가? 너 잘 돼서 학교 앞에 플래카드도 걸리고 그러면 어머니도, 선생님들도 얼마나 뿌듯해하시겠어? 자소서도 딱 스토리가 나오는구먼. 너도 참,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 괜히 어쭙잖은 애랑 어울려 다니니까 이런 일에 휘말리는 거 아냐. 그런 애들은 너한테 하나도 도움될 거 없어.

    준희 걔네들은요? 그 학원 다니는 애들이요.

    선생 (당황한) 그건… 선생님들이 알아서 할 거니까 너는 신경 쓸 거 없어! 너도 어디 가서 말조심하고.

    준희 (못마땅한) ….

    선생 너는 어떻게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대답이 없어? 우리 제발 좀 조용히 지내자. 나 정말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야. 응?

    준희 …선생님.

    선생 어?

    준희 저 질문이 있는데요.

    선생 (긴장한) 무슨 질문?

    준희 (한참을 주저하다 말을 삼킨다) …선인장 키워보신 적 있으세요?

    선생 서, 선인장? (안도하는) 뜬금없기는. 아~ 너 내가 그 선인장 화분 보고 뭐라 그랬다고 이러는 거냐? 네가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준희 선인장에 꽃이 필까요?

    선생 선인장이야 물 잘 주고, 햇빛 잘 쐬고, 그럼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거지. 안 그래?

    준희 물을 얼마나 주고 햇빛은 얼마나 쐐야 하는데요?

    선생 무슨 쓸데없는 소릴 계속 하고 있어? 너 진학 희망 조사서도 아직 안 냈지? 상담해야 하니까 내일까지 가져와. 알겠어? 가봐. 집에 일찍 들어가고.



    선생, 퇴장한다. 준희, 선생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사이.



    김(소리) 야, 빨리 안 오고 뭐 해?



    김, 등장한다.



    김 (준희 얼굴을 살피며) 너, 무슨 일 있어?

    준희 …우리, 오늘은 청소 하지 말고 도망갈까?

    김 (씩 웃는다) 그래! 가자!



    암전.



    7장

    명전. 무대 후면에 밤하늘이 떠 있다. 준희, 책상 위에 무릎을 그러안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김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늘을 본다.



    김 저게 오리온자리인가?

    준희 오리온은 겨울 별자리인데?

    김 (머쓱한) 넌 도망쳐서 한다는 게 고작 별똥별 보는 거야?

    준희 (웃는) 앉아봐. 곧 시작해.

    김 뭐가 보이긴 해?

    준희 별을 보려면 최대한 어둠에 익숙해져야 해.

    김 (책상 위에 걸터앉고) 근데 사람들은 왜 별을 좋아할까? (노래 부르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그런 노래도 있잖아.

    준희 예쁘잖아. 빛이라는 거. 우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4퍼센트에 불과해. 나머진, 암흑이지.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사이)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순간에, 그러니까 처음 빛을 보는 순간에 울잖아. 그런데 울지 않으면서 사는 게 이상하지 않아? 어쩌면, 계속 울음을 참고 사는 거 아닐까? 아이를 낳아본 사람은 그 고통을 기억하지만, 자기가 태어날 때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이유가 아프고 무서워서래.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폐는 아프고, 여긴 너무 밝고 시끄럽기까지 해. 그걸 감당하는 건 그 순간에 그 아이밖에 없는 거지. 너무 잔인하지 않아? 저기 우주에 가면 어떨까? 좀, 비슷하지 않을까? 어둡고 조용하고.

    김 그렇지만 저긴 산소가 없어. 금방 죽어버리겠지.

    준희 그럴까? 가끔, 달보다 구름이 더 멀어 보일 때가 있어.

    김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웬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해?

    준희 말도 안 되는데,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게. 달에 가본 적 있어?

    김 달에? …농담이야?

    준희 아니. 농담 아냐. 달에 가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름보다 달이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어?

    김 당연하잖아! 우주엔 공기가 없어. 구름도 없고.

    준희 (장난스러운) 어떻게 알아?

    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교과서에도 나와 있어. 학교에서 배운다고.

    준희 그 책을 어떻게 믿지?

    김 너 지금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거야?

    준희 그걸 확신할 수 있냐는 거야. 너,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에 대해 들어봤어?

    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뭐?

    준희 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 스파게티 면으로 된 다리가 여러 개 있고, 눈은 미트볼이야.

    김 뭐?

    준희 그 괴물을 창조주라고 믿는 종굔데, 정식 종교로도 인정됐어. 아멘 대신 라멘이라고 기도한대.

    김 라멘? 먹는 그 라멘? 장난해?

    준희 예수가 인간의 모습인 게 더 이상하지.

    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정말.

    준희 아직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지구 평면설에 대한 근거가 얼마나 많은데. 너 수평선 그릴 때 어떻게 그려? 직선으로 그리지?

    김 응. 수평선이니까.

    준희 평평한 수평선을 본 사람은 많지만, 휜 수평선을 봤다는 사람 본 적 있어?

    김 어?

    준희 지구가 둥글면 수평선이 휘어야 하잖아.

    김 지구가 너무 크니까 그렇지.

    준희 휜 수평선을 보려면 인간이 올라갈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가야 해. 그러니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겠어?

    김 위성사진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준희 그건 사진이잖아.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지.

    김 하, 너도 그렇게 생각해?

    준희 의심하지 않을 순 없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사형당할 뻔했어.

    김 지금은 천동설을 주장한다고 사형 당하지 않아.

    준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걸 믿는 것과 스파게티 괴물을 믿는 것 사이에 다른 게 뭘까? 우린 대체 뭘 믿고 있는 거지?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별은 아직 살아 있을까? 별빛이 빛의 속도로 지구까지 오는 사이에 이미 별은 없어졌을지도 몰라.

    김 내 눈에 보이는 저게 지금은 없다고?

    준희 밤하늘의 별을 보는 건 과거를 보는 거라잖아. 태양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별도 4광년이나 떨어져 있어. 그럼 저 많은 별빛들은 언제부터 지구를 향해 온 걸까. 언젠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거겠지?

    김 그래도 아직 빛나고 있잖아! 설령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별이 사라지고 없대도 먼 거리만큼 오래 빛은 남아 있겠지.

    준희 (미소 짓는) 그렇지. 아직은. (사이)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불행은 미래의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누군가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조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김 그렇게 믿고 싶어?

    준희 그럼 마음이 좀 편하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초자연적인 존재보단 훨씬 믿을 만하지.

    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사이) 근데… 별똥별 오늘 안에 떨어지긴 하는 거야?

    준희 이상하다. 분명히 뉴스에서 그랬어.

    김 만화에만 나오는 거 아니야? 그게 맨눈으로도 보여?

    준희 나 어렸을 때 본 적 있어!

    김 진짜?

    준희 거긴 여기보다 어두워서 별이 더 잘 보이긴 했는데….

    김 이 방향으로 보는 거 맞아? (책상에서 내려와 이리저리 돌아본다) 벌써 지나간 거 아냐? 별똥별은 무슨, (놀란) 어?



    준희, 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고는 바로 손을 모아 기도한다. 김도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잠시 후 눈을 뜨는 두 사람.



    김 …봤어?

    준희 아니.

    김 뭐야, 그럼 소원을 왜 빌어?

    준희 네가 본 거 아니었어? 그래서 한 건데.

    김 뭐가 지나간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넌 미신 같은 거 안 믿는다며.

    준희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무슨 소원 빌었어?

    김 선인장 잘 자라라고.

    준희 (웃는다)

    김 보통 선인장은 사막에서만 산다고 생각하잖아. 근데 칠레에서부터 캐나다까지 서식한대. 웬만해선 산단 얘기지. 게다가 종류가 5000종이 넘어. 엄청나지? 근데 꽃이 피려면 조건이 꽤 까다로워. 나 요즘 걔 앞에서 말도 얼마나 가려서 한다고.

    준희 되게 열심히 하네.

    김 넌 무슨 소원 빌었어?

    준희 나? 음….

    김 난 말했는데 넌 말 안 해줘?

    준희 혹시라도 유성이 지구에 떨어진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지길.

    김 뭐? 너 무슨 그런 불길한 말을 해.

    준희 누가 다치면 안 되잖아.

    김 당연히 안 되지!



    짧은 암전 후 명전. 무대 가운데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 꽃 핀 선인장 화분이 있다. 무대 후면, 별이 가득한 밤하늘에 유성이 지나간다. 암전. 막.
    조지민

    조지민

    1994년 부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 김철리 연출가·장우재 대진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올해도 응모 편수가 많이 줄었다. 현장의 여러 희곡상에서도 수상작을 못 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해볼 일이다. 징후에도 암과 명이 있다. 올해 응모작의 관심분야는 그리 넓지 않았고 단순히 연극적인 작품은 줄어든 반면 대동소이했다. 비관이 곧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은 어리다. 우리는 현재의 징후를 다시 '통찰'하기 위해 소재가 동반하는 어쩔 수 없는 선정성을 작가가 어떤 입장에서 컨트롤하고 있는지, 글쓰기의 어려움과 시대 읽기의 어려움을 분리해서 사고하고 있는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바를 단지 인물을 빌어 말하지 않고 극 자체가 그것을 알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최종 후보작은 <무덤>, <빨갛게 익은>, <선인장 키우기>였다. <무덤>은 죽은 아버지가 밤마다 찾아와 아들에게 어려움을 토하고 옆 공간에선 태어나기 힘든 생명이 그것과 연관되어 탄생하는 구조였지만 의도가 일찍 읽혔다. <빨갛게 익은>은 공력은 보였지만 '나리타 투쟁'으로부터 지금 여기에 유효한 메시지를 끌어내려는 시도는 단막으론 역부족으로 보였다. <선인장 키우기>는 시험지 유출 사건에 용의자로 몰린 두 학생의 철없어 보이는 대화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들은 삶의 '부당함'을 세계의 '불가해성'에 욱여넣으려 했다. '부당'과 '불가해'는 다른 것이지만 두 사람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그러한 행위가 자연스럽게 불확실한 시대를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서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 '서정'이고 젊다. 햇살이 한줄기라도 들어오면 그걸 붙잡아야 하는 시기일지 모른다. 우리는 <선인장 키우기>를 당선작으로 하였다.
  • 조지민

    조지민

    1994년 부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두 주인공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아서 오래 이 작품을 붙잡아 두었습니다. 이제 독자와 관객 분들께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는데도 처음 두 사람을 만났을 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끝내 그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빛나는 순간들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일들은 종종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제가 특별히 부족하거나 불운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꼭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뻤던 이유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 기뻐했기 때문이고, 그다음은 그들에게 조금 덜 미안해하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바라온 일인데 막상 당선이 되고 나니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래도 이 부끄러움을 안고 좀 더 써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함께 읽고, 쓰고, 이야기 나누었던 선생님들과 동료들 덕분입니다. 문학의 테두리 밖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신 주찬옥 선생님, 이승하 선생님, 방현석 선생님, 정은경 선생님, 이대영 선생님, 전성태 선생님, 김근 선생님, 김민정 선생님 감사합니다. 희곡을 만나게 해준 노리터, 희곡을 놓지 않게 해준 희곡 소모임 동료들, 그리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만난 문학보다 소중한 사람들, 모두 고맙습니다. 여러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문학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제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덜 다치도록 지켜주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 감사합니다. 당신들을 만난 게 제 가장 큰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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