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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영화적 실천의 가능성

by  최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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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화를 통한 ‘포착’은 가능한가?

    사회는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므로 표면에 드러난 현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현상의 근원적 작용방식이나 통시적 구조에 대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주어진 현상 밑으로 겹겹이 쌓여 상호작용하는 다층의 심급들을 면밀하고 치밀하게 해체-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현상의 얼개를 다소간 추측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최초로 현상이 관찰자의 시야에 포착된 이후, 여러 차례 현상을 전시 및 재전시하는 일만으로는 저변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고 심지어 적확한 원인 분석에 훼방을 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을 전시하는 일 자체가 쓸모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현상은 전시를 통해 비로소 현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상-전시-현상의 순환을 통해 ‘말해진 것’으로서의 현상은 ‘말함’으로서의 현상으로 끊임없이 전환된다.

    현상-전시는 장르적으로 보면 다큐멘터리와 친밀하다. 다큐멘터리의 유용함은 ‘시야에로의 포착’이라는 그 기능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물론 이 ‘포착’은 그 안에 ‘전시’를 배태하고 있는 ‘포착-전시’로서의 ‘포착’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역할이란 이런 것이다. 시공간에 피어있는 온갖 현상들 가운데 특정한 현상을 선택하기-현상을 둘러싼 외물과의 경계를 정하고 현상과 얽혀있는 외물을 보기 좋게 제거하기-현상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고 전시용 프레임에 맞게 크기를 재단하기-관객이 드나드는 길목에 전시하고 관객으로부터 외면받기. 다큐멘터리는 ‘포착’을 통해 일상으로부터 현상을 구출한다.

    그렇다면 픽션-영화(이하 ‘영화’)를 통한 ‘포착’은 가능한가? 영화는 재단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허구의 사건을 프레임에 담는다. 영화는 현상을 포착하지도 않고 포착된 현상을 전시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현상을 모방한다. 다큐멘터리가 포착해내는 데 실패한 이미지를 재현해내고 다큐멘터리가 밀고 들어가지 못하는 영역을 상상적으로 구축한다. 이때 영화가 구축하는 것은 ‘일상’이다. 다큐멘터리가 포착한 현상에서 마디마디 끊어져 있거나 일부가 탈각된 개인의 내밀한 일상을 모방을 통해 변용시켜 재조립함으로써 영화는 현상으로부터 다시금 일상을 구출한다. 이제 일상은 ‘사태’의 지위를 획득한다. 켄 로치의 영화는 ‘일상’을 ‘사태’로 지양시키는 끊임없는 시도라고 요약될 수 있다.

    켄 로치는 ‘보여주기’를 통해 일상을 재현한다. 일용직 건축노동자, 미화원, 실직자, 미혼모, 이민노동자, 철도노동자, 택배기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한다. 대부분의 쇼트가 등장인물의 일터와 일, 집과 가족, 식사와 대화를 보여주고 있을 정도로 켄 로치의 일상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 갈등은 이러한 일상의 지속이 깨지게 되는 시점에, 기존의 일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중심인물의 심리적 반작용으로서 제시된다. 집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 채권자를 찾아가 다투다 실수로 죽게 만들거나(레이닝 스톤, 1999), 실업급여 상담직원의 관료적 태도에 화가 나 건물 외벽에 페인트로 신속한 행정처리를 촉구하는 글을 쓰거나(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학업을 소홀히 하고 정학을 당한 아들이 자신의 차 키를 숨겼다고 의심해 뺨을 때리는(미안해요, 리키, 2019) 사건들은 모두 일상적 생존권을 위협받은 개인이 취하는 일종의 반사작용이다.

    경영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고(네비게이터, 2001), 굶고 있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동생을 취직시키기 위해 남자에게 몸을 파는(빵과 장미, 2002) ‘일상’은 영화의 플롯 상에서 결코 ‘갈등’이나 ‘위기’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켄 로치의 주인공들은 숨 쉬듯이 생존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순간에 고통스럽게 숨을 참는 방식으로 자신을 향한 일상의 위협에 반사적 저항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들 셉의 뺨을 때린다고 리키의 빚이 줄어들 리 있겠는가(미안해요, 리키). 지속할 수 없는 숨 참기의 고통은 결국 주인공들을 다시 숨 쉬게 만들고 일상의 위기 속으로 그들을 몰아낸다.

    켄 로치가 ‘보여주기’를 통해 의도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보여주기’를 통해 드러난 인물들의 삶의 본질적 변혁일 것이다. 그런데 켄 로치는 <빵과 장미> 이후로는 그 목표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최근 제작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에서 그는 변혁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오히려 ‘당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냐’며 고통받는 주인공에게 책임을 물을 뿐이다(미안해요, 리키). 다니엘은 결국 질병 보조금을 받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사망하며(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키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택배 일을 하러 출근한다(미안해요, 리키). 조금도 나아진 것은 없다. 켄 로치는 우리에게 단지 보여주기만 한다.

    이러한 ‘보여주기’는 관객의 ‘보기’와 대응한다. 본다는 것은 사태로부터 거리를 두고 벗어나 있음을 전제한다. 영화가 관객을 사태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단지 ‘보기만 하라’고 지시할 때, 관객이 끊임없이 겪게 되는 것은 바로 외부인-됨이다. 사태와 어떠한 접점도 없이 사태의 바깥에 존재하는 관객은 영화를 보는 것으로부터 어떠한 정치성도 지향성도 이념성도 획득하지 못한다. 영화가 제공하는 것은 오로지 사태뿐이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영화를 통해 관객을 관객(觀客)으로서 호명할 뿐 다른 그 무엇으로도 호명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B-13이라는 좌석번호로, 또는 abc123라는 ID로 지칭된다.

    한편, 주인공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에서 삶의 위기를 겪는 관객은 주인공의 삶에 감정이입함으로써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태의 당사자일 수도 있음을 예감하면서 스스로 사태의 안에 들어가 있다고 착각하는 이 관객은 그 순간 당사자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내부인-됨이다. 이때, 관객은 사태의 바깥에 놓인 외부인의 위치에서 내부인으로 사태를 경험하게 되는 상황적 모순을 겪게 된다. 모순을 해소하고자 발버둥치는 관객은 이내 ‘보기’가 자신에게는 애시당초 성립불가능한 전제였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처한 모순으로부터 ‘보기’의 불가능성을 연역해낸다. 결코 사태의 외부인일 수 없는 당사자적 개인은 끊임없이 외부인의 위치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기’를 중단하고 사태의 안으로 ‘들어가’ 이를 직접 마주하려는 해체-재조립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이로써 켄 로치는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호명하는 의도된 아이러니를 이끌어 낼 뿐 아니라 짝으로서의 ‘보기’를 잃어버린 ‘보여주기’는 더 이상 ‘보여주기’로 머무르지 않게 된다.

    2. 재현된 환부에는 고통이 있는가?

    켄 로치는 영화를 통해 삶을 변용적으로 재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재현의 유효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말하자면 ‘재현된 환부에는 고통이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넘어져서 살갗이 벗겨진 피부를 모사한다고 해서 그 벗겨진 살갗에 깃든 고통까지 베껴낼 수는 없다. 물론 그 재현된 환부를 보는 사람은 간접적인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외상 환자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외상 환자의 사진이나 영상은 재현된 환부가 아니라 진짜 환부를 영상기술로 복제한 ‘복제된 환부’이고 재현된 환부는 태생적으로 거짓인 환부이므로 둘에 대한 관찰자의 간접감각을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재현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모방은 진실을 담지할 수 있는가? 얼마나 진실과 가까울 수 있는가? 영화가 일상을 재현하는 방식은 결코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실재를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연기와 소품과 인공조명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에 늘 따라붙는 질문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폭로하는 것의 유효성이다. 이러한 질문은 탈-은폐된 진실을 그 실증 불가능성을 트집잡아 재-은폐한다. 그려진 삼각형은 삼각형이 아니며 그려지지 않은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직각 두 개와 같다는 것은 결코 실증할 수 없다는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의 진실성-사실성-은 그 유효성을 의심받는다.

    설령 이러한 궤변적 질문을 못 들은 척 넘겨버린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의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의 연속된 일상이 크레딧이 끝남과 동시에 ‘파티’와 ‘인터뷰’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안다. 리키 역의 크리스 히친은 더 이상 하루 100파운드 남짓을 버는 택배기사가 아니다. 그는 켄 로치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력을 가지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케이티는 더 이상 돈이 없어 생리대를 훔치는 미혼모가 아닌 드레스를 입고 인터뷰에 응하는 헤일리 스콰이어로 살아갈 것이다. 관객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처럼 관객이 재현된 환부의 비-존재성을 인식할 때, 영화적 서사는 사실성을 잃고 만다. 리키가 더 이상 리키가 아니라 크리스 히친임을, 케이티가 더 이상 케이티가 아니라 헤일리 스콰이어임을 인식할 때, 관객은 인물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서사의 실재성마저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내부인으로 호명된 관객의 개입이 시작된다. ‘보기’가 재현된 환부를 비-존재로 명명할 때, ‘들어가기’는 허구성이 폭로된 서사가 빠져나간 자리에 내부인-된-관객의 실존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재현된 환부가 제거된 자리에는 생생하게 역동하는 내부인-된-관객의 환부가 드러난다. 크리스 히친이 빠져나간 리키는 한국의 200만 특수고용노동자 관객의 내부인-됨으로 생기를 얻고 헤일리 스콰이어의 케이티는 이제 2만 명의 미혼모 관객의 삶으로 다시 빚어져 지금-여기의 케이티로 실재한다.

    재현된 환부는 그 허구성으로 인해 부정되지만, 그것이 부정된 자리에 그러한 환부를 몸에 지닌 내부인-된-관객의 증언과 비명을 채워 넣음으로써 재현된 환부는 복제된 영상이 제시하는 ‘복제된 환부’보다 더욱 사실적인 환부-성을 획득하게 된다. 켄 로치의 작업은 이러한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재현된 고통’의 존재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재현된 환부가 과연 유효한 보여주기인가’ 하는 물음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이중의 차단벽

    켄 로치의 영화에는 외부인으로서의 관객을 투사하는 인물들이 반드시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주인공에게 감정적 위로를 건넨다. 고용센터에 방문한 다니엘이 복잡한 신청 절차에 어지러움을 호소하자 멀리서 다가와 물을 건네는 앤이나(나, 다니엘 블레이크), 도움이 많이 필요한 노인을 추가 수당 없이 더 돌봐주면서도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애비에게 괜찮냐며 말을 건네는 버스정류장의 노년 여성(미안해요, 리키)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부인-됨에 실패한 관객이 그저 ‘보기’로서 주인공의 삶을 관찰할 때 외부인-된-관객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동정과 연민을 투사한 존재들로서 관객을 대신해 주인공과 접촉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인적 인물들은 결코 내부인-됨에 성공하지 못하고 한계를 맞닥뜨린다. 다니엘의 인터넷 사용을 돕던 앤은 민원인에게 과도한 도움을 제공하지 말라는 상사의 제지로 인해 더는 다니엘을 돕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가 버리고(나, 다니엘 블레이크), 애비에게 말을 건넸던 노년 여성은 자신이 탈 버스가 오자 애비를 두고 떠난다(미안해요, 리키). 이들은 실질적으로 다니엘과 애비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과제는 다시금 오롯이 다니엘과 애비에게 남겨지게 된다.

    이와 같은 장치는 외부인-된-관객과 내부인-된-관객 사이에 이중의 차단벽을 세운다. 첫째는 서사 내에 외부인적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외부인-된-관객이 서사 내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차단한다. 내부인-된-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당사자성을 획득함으로써 서사 내로 ‘들어가는’ 반면, 외부인-된-관객은 이러한 당사자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한 탓에 자신이 느끼는 연민과 분노의 감정을 해소할 다른 수단을 찾게 된다.
    만약 서사 내에 외부인적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외부인-된-관객은 이를 서사 외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되고 이는 영화의 바깥에서 내부인-된-관객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나타나거나 또는 이를 둘러싼 사회제도에 대한 분노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인-된-관객은 결국 내부인-된-관객과 계급적 이익을 달리하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연민이나 분노가 실천적 변혁을 야기하는 최종 국면이 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계급적 이익에 따라 내부인-된-관객과는 상반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변화는 지연되고 동력은 상실된다. 켄 로치는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많이 겪어왔기에 서사 내에 외부인적 인물을 배치시킴으로써 외부인-된-관객의 연민과 분노를 그 인물을 통해서 해소시켜 버린다. 즉, 외부인-된-관객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서사 내의 외부인적 인물이 대신하게 만들어 외부인-된-관객이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게 한다.

    외부인-된-관객의 내부인-된-관객 방향으로의 접근을 차단한 뒤, 켄 로치는 서사 내 외부인적 인물의 개입이 주인공의 삶을 바꾸는 데 실패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주인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도움의 가능성을 일소한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차단벽이다. 이는 내부인-된-관객이 외부인-된-관객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몸을 의탁하고 협력을 바람으로써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음을 뜻한다. 켄 로치는 이렇게 이중의 차단벽을 세움으로써 외부인-된-관객과 내부인-된-관객 사이의 접촉을 양방향에서 모두 끊어버린다. 그리고 내부인-된-관객으로 하여금 오로지 의지하고 협력할 수 있는 이는 자신과 같은 계급적 이익을 가진 ‘당사자들’ 뿐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중의 차단벽은 ‘보여주기’라는 전략을 택한 켄 로치의 서사 전달방식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보여주기’와 ‘이중의 차단벽’이 결합한 자리에는 숨겨진 마지막 차단벽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주인공과 내부인-된-관객 사이의 차단벽이다. 재현된 환부가 제거된 자리에 내부인-됨을 통해 자신의 환부를 드러낸 내부인-된-관객은 이제 주인공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당사자성을 획득한 관객은 주인공이 떠난 자리에 자기 자신이 들어앉아 있음을 보게 된다. 이때, ‘보여주기’는 주인공이 떠난 자리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미래도 제시하지 않고 희망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부인-된-관객이 받아 안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부인-된-관객은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의 환부를 직시한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의 환부로서.

    4. 영화적 실천의 가능성

    켄 로치는 본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영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언뜻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현상의 배면을 적극적으로 스크린에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이중의 패배를 겪는데 이에 대해 켄 로치가 취하는 조치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중의 패배란 첫째는 영화의 내적 패배이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삶이 서사적으로 어떠한 변화도 겪지 못하고 그 상태 그대로 원점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이어진다. 밥은 실직자로 등장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레이닝 스톤). 다니엘은 영화 초반에 질병 보조금 신청이 기각되었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후반부까지 질병 보조금을 받지 못한 채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케이티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미혼모로 살아간다(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키는 빚을 내서 운송용 밴을 구입해 열심히 일하는데, 일 때문에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고 몸을 다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밴을 몰고 일을 나간다(미안해요, 리키).

    두 번째는 영화의 외적 패배이다. 영화가 개봉하고 택배기사의 노동환경이나 사회 제도가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영화를 통해 서사 내의 내러티브적 승리도 성취하지 못하고 서사 외부의 매체-실천적 승리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승인되는 이중의 패배는 켄 로치의 영화가 과연 실천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실천의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지 않은 영화라면 그 영화를 통해 그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애초에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켄 로치는 끊임없이 패배를 만들어내는 감독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패배를 창조해낸다. 수백 명의 스탭이 주인공 몇 명을 이중, 삼중으로 패배하게 만들기 위해 인생을 걸고 시간을 쏟는다. 켄 로치는 있는 힘을 다해 주인공을 넘어뜨린다. 주인공이 속한 가정과 계층과 사회를 넘어뜨린다. 최선을 다해서 장기 말을 정해진 위치에 가져다 놓고 넘어뜨리는 작업. 켄 로치의 영화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러한 작업-넘어뜨림-을 수행한다. 말이 결코 바로 설 수 없는 울퉁불퉁한 말판으로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끌고 와 바로 그 자리에 넘어뜨리는 것. 넘어짐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 그 자리, 그 순간을 기억하는 일. 켄 로치는 말을 넘어뜨려 놓음으로써 ‘다시 세울 수 있음’을 불러낸다. 말을 끌고 와 넘어뜨리는 과정은 언젠가 그 자리에서 말을 다시 바로 세울 수 있음을 내포한다. 즉 ‘다시 일으킴’을 ‘넘어뜨림’의 안티-테제로 소환해 ‘넘어뜨림’의 내부에 트로이 목마처럼 심어놓는 것이다.

    영화는 다시 일으킴을 의도적으로 유예함으로써 매번 말이 넘어진 자리와 시간을 말판에 새긴다. 넘어진 말을 통해 관찰자가 언젠가 말판의 울퉁불퉁함을 인식해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말을 갖고 와서 넘어뜨리고 그것을 바로 세우려는 시도를 지연시킨다. 말을 바로 세우려는 시도는 말판의 울퉁불퉁함을 은폐하고 ‘다시 일으킴’의 실패를 말을 바로 세우려는 자의 개인적 패배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켄 로치는 말을 바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새롭게 넘어뜨릴 뿐이다. 넘어뜨림으로써 말판의 울퉁불퉁함을 사람들에게 폭로하고자 한다. 그리고 누구도 함부로 말판을 뒤집어엎거나 숨길 수 없도록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남겨 둔다.

    4. 켄로치를 기억하기

    켄 로치의 영화적 실천은 완결적이지 않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뜻이고, 연대적 실천의 희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며, 누군가 울퉁불퉁한 말판을 고쳐서 말을 일으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깊게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켄 로치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실천이 그의 세대를 넘어 이후 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믿음은 매번 최선을 다해 말을 넘어뜨리는 그의 영화작업을 통해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켄 로치와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해야할 일은 한가지다. 그를 기억하는 것. 그가 넘어뜨린 말을 기억하는 것. ‘내부인-됨’을 통해 말판으로 ‘들어가서’ 그 공간과 그 시간에 나 자신을 넘어뜨리는 것. 내가 넘어져 있음을 기억해내는 것. ‘다시 세울 수 있음’을 기억해내는 것. ‘외부인-된-관객’은 차단벽 너머로 ‘보기’만 할 뿐이고 ‘내부인-된-관객’은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놓고 죄다 ‘넘어져’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것. ‘다시 일으킴’이란 곧 ‘스스로 다시 일어남’이자 ‘스스로 다시 일어나자고 소리침’이며 ‘내부인-된-관객-들’의 ‘다같이 다시 일어남’임을 기억할 것.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무수한 ‘넘어짐’이 목격된다. 고용불안, 열악한 근무환경,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곳곳에 필연적인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죄다 ‘넘어져’ 있는 곳에서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잘리고 베이고 치이고 쓰러지고 사라지는 삶을 겪어낸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일어나자고 소리쳐야 한다. 다시 일어나자고 소리치려면 내가 넘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잠시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 버렸음을 알기 위해서는 피가 흐르는 환부를 직시해야 한다.

    켄 로치를 기억한다. 그가 넘어뜨린 말들이 다시 일으켜 세워지는 날이, 그의 희망과 확신이 현실이 되는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감히 예감해본다.
    최철훈

    최철훈

    1991년 부산 출생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졸업

  • 김시무 영화평론가(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켄 로치-영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읽고 느낌이 왔다. 모처럼 제대로 된 비평을 만난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는 현상-전시, 즉 현상을 통해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 장르라고 한다면 픽션영화(극영화)는 현상을 모방한다. 켄 로치 감독은 역설적이게도 극영화를 통해서 현상-전시를 추구해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적 실천이 가능한가. 그는 보여주기를 통해서 일상을 재현하고, 재현된 환부를 통해 고통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중의 차단 벽이 필요하다. 감독은 양자의 관객 사이에 차단 벽을 설치해 주인공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는 두 번의 패배를 거칠 수밖에 없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 차단 벽 내의 등장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첫 번째 패배다. 또 그의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외적 현실은 여전히 바뀐 것이 없다. 차단 벽 너머의 관객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두 번째 패배다. 이처럼 영화적 실천은 늘 미완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왜 그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중의 차단 벽 속에서 실패를, 즉 무수한 넘어짐을 기록하고 그저 폭로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인데,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처럼 요약할 수 있는 평자의 글에서 본 심사자는 켄 로치의 영화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을 수 있었다. 이밖에도 영화 ‘미나리’와 ‘노매드랜드’ 등을 다룬 몇 편의 뛰어난 평문들도 있었으나 이 글의 치밀성을 넘어서기에는 다소 부족했다고 판단했다.


  • 최철훈

    최철훈

    1991년 부산 출생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졸업

    돌이 던져졌다
    물결이 일렁였고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어리석게도 나는
    슬픔을 떠올렸다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한다. 나는 켄 로치의 방식이 좋았다. 좋아서 더 봤고 더 읽었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쓰는 순간엔 호기로웠고 쓴 끝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원고를 보냈다. 그건 켄 로치를 기억하기 위한 나만의 작은 의식(儀式)이었다.

    당선 소식은 잔잔한 물 위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나의 일상에 달려와 부딪쳤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부딪침이라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달라진 것은 없다. 나의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나는 켄 로치의 영화가 남겨준 과제를 하나씩 풀어갈 것이다.

    졸고를 손에 쥐고 막막하다 여기셨을 심사위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진주알 같은 순간을 함께한 친구와 불민한 제자를 참고 기다려주시는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내 삶을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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