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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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는 작업에 필요한 칼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가지고 다니던 칼이 망가져 급하게 새 칼을 장만해야 했다. 칼을 함부로 버리면 위험한 일이 생긴다는 미신 때문에 지오는 날이 부러진 칼을 오토바이 트렁크에 가지고 다녔다. 지오의 오토바이에는 여러 번 붙였다 뗀 영업용 스티커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열일곱에 가출 팸을 나온 뒤로 많은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이번 일만큼 시급이 높은 일은 없었다.
신호에 걸린 지오는 도로 위에서 습관처럼 메시지 창을 열었다. 아침 일찍 보낸 메시지가 읽히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며칠 전에 보낸 것도 지난달에 보낸 것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부업을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흘렀고, 지오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시유 없이 혼자서 보냈다. 일 때문에 서로 예민했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직은 시유가 떠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을 구겨 넣듯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엑셀을 당기자 나무들이 뒤로 휙휙 지나갔다. 지난번에 시유와 함께 갔던 상점을 향해 지오는 오늘 홀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상아색 컨테이너 도매상점은 수천 가지 칼을 판매했다. 지오는 용도에 정확히 맞는 칼을 구입하려고 통로를 오가며 진열장을 살폈다. 상점 사장은 지오가 돌아다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날카로운 칼날을 연신 기계에다 밀며 눈으로는 데스크톱 모니터만 주시했다. 지오도 슬쩍 화면을 보았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야산에서 네발짐승을 추적하고 있었다. 달려가는 짐승의 뒷다리를 폭이 좁은 조명이 빠르게 따라갔다. 빛이 요동쳤고, 총성이 울렸고, 비명 섞인 숨소리가 흩어졌다. 앞으로 달려가는 남자의 칼날이 눈부신 서치라이트를 반사했다. 지오는 바로 앞 진열장에 가까이 다가섰다. 가장 비싸 보이는 칼을 집어 들고 허공에 손을 그어 보았다.
무슨 칼 찾아요.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사장이 근처까지 와 있었다. 정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던 지오가 어떤 칼이 가죽을 잘 자르나요, 물었더니 사장은, 무슨 가죽이요, 하고 되물어왔다. 여전히 어려웠다. 올가미 덫을 자르고 가죽도 좀 잘라야 하는데요, 지오가 말하자 사장이 이번에는, 그러니까 무슨 가죽이요, 동물 잡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오는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말했다.
저 동물 구조센터에서 일해요.
그제야 사장은 대충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지오는 내색하기 어려운 불안을 느꼈다. 그간 지오가 사용해 온 칼날에는 꺼림칙한 동물 지방이 잔뜩 끼어 있었다. 상점 사장이 오토바이 트렁크를 열어 기름 낀 칼날을 보기라도 한다면 재차 미심쩍은 눈초리로 칼 주인을 훑어볼 것이 뻔했다. 지오는 상처 난 자신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췄다. 사장의 시선이 지오의 얼굴과 어깨를 거쳐 마지막에는 손등에 고정되었다.
정형 칼 가져가요. 업자들은 곱창 칼이라고 하는데, 이게 뭐든 잘 잘립니다.
사장이 가늘고 작은 칼을 건네며 말했다.
근데 아직 학생 아니에요?
지오는 대답 대신 현금을 내밀어 칼 값을 지불했다. 거스름돈을 돌려받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사장의 관심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등을 보인 사장이 포장용 신문지를 꺼내는 사이 칼을 챙겨서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오토바이에 오른 지오는 차가 없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다시 도로변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맞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투명한 가을볕이 내리는 곳은 따뜻했다. 휴대폰 거치대를 눈높이까지 올려 전방과 동영상을 절반씩 응시했다. 휴대폰에서는 칼집 사장이 보던 유튜브 영상이 흘러나왔다. 오토바이 앞 유리는 낮이고 휴대폰 액정은 밤이었다. 이따금 영상에서 중요한 장면이 나올 때면 지오는 한낮의 평화로운 풍경을 무시하고 밤의 영상에 신경을 집중했다.
깊은 밤에 랜턴 조명을 켜놓은 남자는 말하고, 달리고, 때때로 욕설 섞인 고함을 질렀다. 다급한 목소리로 형님, 하고 소리칠 때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쓰러졌다.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영상 밑에 댓글을 달기로 했다. 동물의 불법 포획 영상에 경고 댓글을 달고 구조 센터에 알리는 것 역시 지오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하나였다.
화면을 내려 추천 수가 높은 댓글을 읽고 있는데 길게 뻗은 흙길 위로 맹렬한 클랙슨 소리가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다가오는 트럭이 보였다. 트럭은 순식간에 거대해졌고, 바로 눈부신 상향 라이트와 손가락질이 눈앞에 도착했다. 지오는 놀라서 경사진 두렁으로 핸들을 틀었다. 브레이크를 당긴 뒤에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더 내려가면 채소밭이었다. 옆을 스쳐가는 트럭의 풍압이 전해졌다. 오토바이를 겨우 멈추고 서서 커다란 엔진음과 차 밑을 때리는 자갈 소리를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트럭이 지나가고 지오는 거치대에서 떨어진 휴대폰을 찾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휴대폰에서는 여전히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핸들을 잡고 천천히 오토바이를 움직여보았다. 구덩이에 빠진 앞바퀴가 큰소리를 내며 회전하다가 기어이 채소밭을 밟고 굴렀다. 소리가 요란했지만 사이드 미러에 비친 채소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듯 보였다. 바퀴도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굳이 내려서 확인하지 않고 지오는 다시 앞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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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주차장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삐딱하게 주차된 짐차가 긴급 상황을 암시했다. 지오는 오는 길에 일분일초도 허비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묻고 빠르게 걸었다. 정문 앞에서 만난 선생님들의 무거운 표정이 잠시 잊고 있었던 심사 일정을 상기시켰다. 일주일에 세 번 구조센터의 관리사 보조 자격으로 출근하는 지오는 구조 동물의 생사를 심사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책상이 일곱 개뿐인 구조센터는 병원 응급실의 대단한 축소판이라, 지오는 수술실에서는 간호사, 숲에서는 구조대원, 야외 계류장에서는 거의 간병인으로 헌신했다.
센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네 모서리를 들고 구조케이지를 옮기는 자원 활동가들과 마주쳤다. 작년 이맘때는 지오 역시 청바지 차림에 푸른색 활동가 조끼를 입고 무리와 몰려 다니곤 했다. 아직은 센터 직원들보다 대학생 형 누나들과 어울리는 쪽이 편했다. 지오를 발견한 활동가들이 구조케이지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케이지가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짐승의 코가 철창 밖으로 삐져나왔다.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개체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멧돼지였다. 맨 앞에 선 활동가 누나가 손끝으로 돼지의 뒷다리를 가리켰다.
저걸 매달고 밭에서 발견됐대.
지그재그 모양으로 날이 선 엽구가 돼지의 허벅지를 조이고 있었다. 돼지가 케이지에서 발을 휘저을수록 엽구는 더 깊숙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활동가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고 다시 케이지 모서리를 들어 올렸다. 돼지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케이지가 기울었다. 지오도 무게가 쏠린 뒤쪽을 양손으로 받쳤다. 여섯 사람은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수술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복도 끝 제일 큰 수술실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재활 관리사 김 선생이 심각한 얼굴로 돼지를 받았다. 수의사들이 전부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외근이 잦은 구조센터에 가만히 앉아서 동물을 기다리는 인력은 거의 없었다.
일단 재우자.
김 선생은 돼지를 케이지 채로 수술대에 올려 진정제를 투여했다. 흥분한 돼지가 좌우로 움직였다. 잠시 기다렸다가 수술대를 덮었던 군용 담요를 젖히자 초점이 흐려지는 돼지의 눈동자가 보였다. 대충 봐도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자원 활동가들이 달라붙어 잠금장치를 풀고 케이지 문을 여는 동안 지오는 김 선생을 도와 응급처치를 준비했다. 먼저 와이어 커터로 스프링을 절단하고 주둥이를 벌려 단단하게 박힌 엽구를 떼어냈다. 뼈가 비칠 정도로 깊은 상처가 표면에 드러났다. 지오는 수의사용 메스 대신 새로 장만한 칼을 김 선생에게 건넸다. 엽구에서 떨어져 나온 이물질이 부패한 가죽과 함께 매끄럽게 잘려나갔다. 뜨거운 피가 솟구치지 않고 아래로 깨끗하게 흘러내렸다. 커다란 천으로 상처를 덮자 돼지는 이불을 덮고 단잠에 빠진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슈오옥슈오옥 돼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지오는 새 칼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일이 수월할 거라는 예감이었다.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낸 지오는 야외 계류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코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면서는 문득 죽음이 없는 하루를 상상해 보았다. 그 생각은 비행 훈련에 열중하는 매 성체를 관찰하면서 더 커졌다. 입원 삼 개월 차 매의 날개는 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짓이겨졌다가 겨우 형태가 잡힌 상태였다. 덕분에 양쪽 끝에 설치된 횃대 사이를 날아다닐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높이가 낮은 구조물로 활강하는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발톱으로 철망을 차고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한쪽 날개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장난감 쥐에 경쾌한 스냅을 실어 계류장 바닥에 던져도 매는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날다가 금세 속도를 줄여버렸다.
크게 휘파람을 불어 매를 불러보았다. 갇혀 있는 매를 부르고 소리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초조했다. 어느새 계류 예산을 초과한 매를 밖으로 내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퇴실 방법은 선임 수의사가 정했다. 살아서 나가거나 죽어서 나가거나. 고통이 심하고 밖에 나가도 제 구실을 못해 죽음이 확실한 아이들은─수의사의 말을 빌리자면─경제적으로 죽여서 내보냈다. 지오는 진심으로 매가 시험 사냥에 성공하기를 바랐다. 계류장 가까이 붙어서 안을 살펴보았다. 철조망 벽에 세워 둔 목재 수납함, 귀찮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인간 눈높이에 쳐놓은 차광막,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설치한 난로 조명 어디에도 지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지오는 철망 밖에 쪼그려 앉아 매를 바라보다가 아예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계류장 안으로 들어갔다. 훈련장은 지오가 열다섯 걸음을 걸어야 끝에 도달할 만큼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었다. 가장자리가 떨어진 차광막을 정비하고 바닥에 뒹구는 장난감 쥐를 집어 들었다. 실제 쥐가 움직이는 속도로 실리콘 쥐를 던졌다. 줄에 연결된 모형 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운동장 바닥을 쓸고 다녔다. 쥐가 발밑을 지나가도 매는 소심하게 날갯짓할 뿐 먹잇감을 건져 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쥐를 줍는 것은 지오의 몫이었다. 줄을 당겨 올릴 때마다 실리콘을 잡는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왜 이렇게 못해?
제멋대로 엉킨 줄의 매듭을 풀다가 지오는 점퍼 주머니에 장난감 쥐를 넣어버렸다. 계속 던진다 해도 매가 제힘으로 사냥감을 낚아채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목 뒷덜미에 닿았다. 지오는 끝까지 잠갔던 지퍼를 조금 내리고, 저녁에 따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지 묻는 김 선생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유는 여전히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아침에 보낸 메시지는 함께 살던 집에 시유가 넣은 보증금 오백만 원을 당분간은 빼주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돈을 재촉하지 않는 시유가 이별 유예기간을 주려는 건지 궁금했지만, 메시지를 무시하는 상황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헤어진 뒤로 줄곧 보낸 모든 메시지를 시유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김 선생에게 답장을 보내려는데 활동가 형들이 사료 통을 들고 계류장을 지나쳐 갔다. 전날 계류장 청소를 도왔던 형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큰소리로 물었다.
매는 잘해?
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절대 성공할 것 같지 않았는데?
쥐를 실감나게 던져주면 잡아요.
지오는 손목에 스냅을 주며 줄을 낚아채는 시늉을 했다.
아직 수의사님 안 왔지? 나도 좀 해보자.
쟤도 쉬어야죠. 오후 심사에서 잘하려면 휴식을 줘야 한 대요.
한 번 뱉은 거짓말은 바퀴가 달린 것처럼 스스로 가속했다. 지오는 형을 계류장 철망 앞으로 데려가는 대신, 장난감 쥐를 낚아채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매의 날갯짓을 장황하게 묘사했다. 실제로 보고 싶었던 장면들을 섞자 설명은 한층 그럴듯해졌다. 횃대를 나뭇가지처럼 차고 날아다니는 매를 상상했는지 형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번졌다.
지오는 형을 동료들에게 돌려보내고 김 선생에게도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마침 매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김 선생의 메시지가 추가로 와 있었다. 훈련의 결과를 묻는 김 선생에게 지체 없이 답장을 전송했다.
─성공했어요.
─방사해도 되겠어?
바로 회신이 왔다. 네, 하고 입력했다가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몇 글자를 입력했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한참 만에 답을 했다.
─제 생각에는요.
전송을 하고 나서는 마음이 편했다. 그저 의견을 낸 것뿐이고 충분히 그 정도 자격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가 형에게 했던 것처럼 그럴싸하게 살을 붙이지는 않았다. 매의 습성을 잘 아는 김 선생을 거짓으로 만족시키려면 너무 많은 것을 꾸며내야 했다.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도 방사를 원하는 지오의 입장에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오는 다른 질문이 날아오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껐다.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지만 확인하지 않고 사무동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길에서 육식 사료가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냄새. 끝이 가벼운 비린내는 뼈를 발라낸 생닭의 냄새였다. 양발로 흰 살코기를 뜯어 먹던 너구리가 지오의 발소리에 철창과 먼 쪽으로 이동했다. 센터와 닿아 있는 야산에서 피리 소리 같은 도요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숲으로 돌아가면 차라리 저렇게 작은 새를 사냥해 먹는 편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지오는 모형 쥐 하나 사냥하지 못하는 매의 날개를 떠올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내내 장난감 쥐와 연결된 줄의 매듭이 걸리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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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진동은 김 선생의 메시지가 아니라 시유의 웹툰 업로드 알림이었다.
농장을 탈출한 돼지가 사람을 패고 다니는 괴상한 만화. 한때는 지오도 채색을 돕고 아이디어를 보탰던 두 사람의 만화. 지오는 돼지가 쉬고 있는 수술실 앞에서 새 연재분을 확인했다. 내용이 들어오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죽 내렸다. 업로드가 늦어 죄송하다는 작가의 말. 그 안에 지오를 향했던 짤막한 글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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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유리로 한낮의 해가 들어왔다. 뿌옇게 빛이 번져 들어오는 창 너머로 계류장으로 가는 통로가 보였다. 유리 벽면에 부착한 버드 세이버 스티커가 사무실 바닥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동물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여러 사람에게 밟힌 것처럼 길쭉하게 늘어지다가 책상 근처에서 외곽선이 깨끗하게 끊어졌다.
낮 시간의 사무실은 시끌벅적했다. 거슬리는 기계식 키보드 소리와 신고전화를 받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구조센터에는 가만히 앉아 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원 활동가들은 필요한 물건을 찾아 뛰어다녔고, 자기 책상이 있는 직원들은 컴퓨터와 캐비닛 책장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철제 책장에는 주로 전문 서적과 개체기록카드 파일이 정렬되어 있었는데, 파일을 들고 의자로 돌아온 사람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책상마다 파티션이 쳐져 있어 직원들은 서로 무얼 하는지 모르고 지낼 때가 많았다.
지오는 김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그가 부탁한 서류작업을 했다. 오전 시간 동안 동물들과 함께한 재활 일지를 작성하고, 서류와 대조하여 사물함 장비 상태를 꼼꼼하게 수정했다. 지오의 노트북 화면 맨 뒤에는 언제나 검정고시 강의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봉사활동 틈틈이 지오는 고졸 검정고시 문제를 들여다보곤 했다.
김 선생과 선임 수의사는 꽤 오랫동안 사무실을 비웠다. 매를 살펴보고 오겠다고 말한 것이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지오는 노트북으로 김 선생이 공유한 문서들을 살피다 처음 매가 들어온 날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구조 접수를 받고 지오를 데려갔던 김 선생이 작성한 기록. 날짜 밑에 첨부된 사진은 모두 지오가 휴대폰으로 직접 찍은 것들이었다.
사진 속에는 종일 땀방울이 흐를 만큼 더웠던 그날의 날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중턱까지 닦여 있는 도로에 차를 대놓고 가파른 은행나무 길을 오르자 멀리 나지막한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석상과 연등이 아니었다면 가정집으로 착각할 만큼 작은 암자였다. 처음 현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지오는 매의 숨이 이미 끊어진 줄 알았다. 매는 절에서 행사를 앞두고 만든 철사 구조물에 날개가 엉킨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날벌레들이 구조물 위를 날아다녔다.
부디 이곳에서 죽지 않게 데려가 주십시오.
스님 하나가 지오에게 다가와 말했다. 등산복을 입은 행인들이 뒤에 서서 지오가 들고 간 빈 케이지를 살폈다. 이곳에서 죽지 않게. 지오는 속으로 그 말을 여러 번 따라했다. 이곳에서, 죽지 않게, 이곳에서, 죽지 않게.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한 말인지 헷갈렸다. 그저 어떻게든 매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걸음 가까이 구조물에 접근하자 지오의 마음을 알았는지 매가 철사에 걸리지 않은 한쪽 날개를 퍼덕였다. 두터운 장갑을 끼고 매를 빼내려고 했지만 복잡하게 얽힌 철삿줄이 풀리지 않았다. 김 선생은 가방에서 커다란 모포를 꺼내 빛이 가려지도록 매를 덮었다. 움직임이 잦아드는 동안에는 바깥쪽 철사를 조금씩 잘라 구조물을 작게 만들었다. 절 앞마당에 모인 사람 모두가 김 선생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옷을 걷어붙인 두 팔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오보다 몸이 작고 마른 김 선생은 질긴 철사 덩어리를 능숙하게 잘라 새 둥지 크기로 줄였다. 김 선생의 가위질은 구조물과 함께 매를 케이지에 넣을 수 있을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수의사님 여기 계세요?
사무실 문을 박차고 소리친 사람은 지난주에 새로 들어온 자원 활동가 누나였다. 수의사를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는지 얼굴빛이 붉었다. 매의 생사가 결정된 줄 알고 지오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었다. 수의사의 책상은 김 선생의 바로 옆자리였다. 빈 책상 앞으로 다가온 누나는 지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큰소리로 물었다.
들었어? 돼지를 죽일 거라는데?
죽는 것이 매가 아니라 돼지라는 말에 지오는 잠시 안심했다. 그래요? 하고 짧은 대답을 뱉고는 자연스럽게 돼지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태연한 척 노트북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의미 없이 마우스를 움직이며 왜요? 못 살린대요? 묻자 누나는 불만 가득한 자세를 하고 대답했다.
여기서는 핸들링이 어렵대.
구조센터에서는 모두가 핸들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오는 사실 핸들링이 쉽고 유연하기로 자기만한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모네 집에 얹혀사는 동안 제 목소리를 낸 적은 거의 없었다. 입기 싫은 헌옷을 물려받거나 억지로 교회 예배당에 앉아 있을 때, 심지어는 사촌 형들 사정에 맞춰 몇 번이나 이사를 다닐 때조차 지오는 별다른 저항 없이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알겠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버릇이 되었다. 중학교 여름방학, 무관심 속에서 집을 나와 팸 식구들을 만났을 때도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듯 그 말을 뱉었다.
뭐가 괜찮은데?
시유는 그렇게 묻곤 했다. 처음은 팸 형들을 따라 술 취한 노인의 돈을 도둑질하고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지오의 등을 톡톡 치고 묻긴 했지만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시유는 지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괜찮다,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면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하게 중얼거려도 시유에게는 지오의 목소리가 닿았다.
팸 누나들 중에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던 시유는 멤버들과 떨어져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공동 생활비를 내고 남은 알바비를 따로 모았고, 한 달에 두어 번 조용히 어딘가에 다녀왔다. 다 같이 모여서 밥이나 술을 먹을 때는 카페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색깔도 없이 단순한 선으로 연결해놓은 동물들, 돼지들, 강아지와 고양이들. 지오는 시유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 그림들이 이야기를 입고 만화로 탄생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만화의 주인공은 돼지 농장에서 태어난 슈퍼 지능 돼지였다. 시유는 플랫폼에 작품을 보내는 대신 네 컷짜리 흑백 만화를 그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연재했다. 팔로워는 적지만 만화를 보는 사람은 높은 비율로 댓글을 남기는 계정이었다. 언젠가 독자들과 재미있는 것을 한다는 시유와 함께 지방에 내려갔을 때 지오는 처음으로 돈을 받지 않고 동물을 위해 일하는 경험을 했다. 형광 조끼를 입은 대학생들을 따라 버려진 동물을 씻기고 먹이고 달래는 내내 지오는 뜻 모를 눈물을 참았고 시유는 그런 지오를 보고 웃었다.
시유가 유명한 정육점 집 딸이고,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팸 식구들이 사는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시유의 친오빠가 스티로폼에 포장된 냉장육을 보내오곤 했다. 시유는 테이프를 뜯어보지도 않고 고기를 모두 버렸다. 다른 사람이 먼저 택배를 뜯어 파티라도 벌이는 날에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시유가 고기를 먹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었다. 탁자에서 남이 남긴 김밥을 집어 들었다가도 고기 냄새가 나면 슬쩍 내려놓고 자리를 피했다.
고기는 자연스럽게 지오의 삶에서도 입지가 줄어갔다. 시유가 스무 살이 되던 해 함께 얻은 작은 셋방도 채소가 나뒹구는 묵밭 근처였다. 한적한 시골집인 것을 감안해도 세가 많이 저렴했는데 흉하게 방치되어 있는 묵밭이 원인인 것 같았다. 원래는 푸른 잎채소가 자랐다는 묵밭은 퍼석하게 말라 죽은 잎으로 덮여 있었다. 밭을 가꾸던 노인이 죽으면서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고 했다. 그 덕에 투룸 월세를 싸게 얻은 두 사람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땅에 상추와 허브를 심어 키웠다. 방 두 개와 공짜 텃밭으로도 충분했는데 시유를 기쁘게 하려고 알아본 동물 구조센터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전에 손수 돼지를 수술실로 옮겼던 활동가 누나는 계속해서 수의사의 판단을 못마땅해했다. 기껏 살려놓은 불쌍한 돼지를 왜 죽이냐는 거겠지. 처음엔 지오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너구리의 안락사를 막겠다고 수의사에게 덤빈 적도 분명 있었다. 그때 김 선생에게 들었던 말을 누나에게 전해주려고 기억을 더듬거렸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그만하면 됐다는, 훈계도 위로도 아닌 애매한 말뿐이었다.
그날은 지오가 처음으로 수술실의 처치를 참관한 날이었다. 한 가운데 원형 조명 두 개를 켜놓은 방 안에 사람들이 빛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고개를 숙여 동그랗게 말린 선임 수의사의 등이 보였다. 빛은 너구리를 내리쬐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오는 전날 자신이 먹이를 챙겨주었던 너구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말리는 김 선생을 뿌리치고 수의사에게 다가갔다. 살려달라고, 달려들어 떼를 썼다. 이미 의식을 잃은 너구리를 눕히는 수의사를 붙잡고 지오는 그렇게 소리쳤다.
얘 누가 들여보냈어?
수의사도 버티고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방생하는 순간 책임지고 추적해야 되는 거 몰라? 예산은 어디서 나오는데? 네가 할 거야?
아직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데 왜 여기서 죽이냐고요.
지오가 말했다. 수의사를 보고 말했지만 모두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밖에 나가면 무조건 죽어. 아무것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그럼 나가서 죽게 두면 되잖아요.
뭐가 다른데?
수의사가 물었다.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한 거야?
지오를 바라보는 눈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만하면 됐다.
김 선생이 지오의 팔을 잡았다. 지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수술실 구석에서 너구리가 눈 감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몇 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무기력했다. 죽음을 막지 못한 것보다 대꾸조차 하지 못한 자신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구조센터에서 처음으로 목도한 안락사는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지오는 가끔 수의사의 질문을 생각했다. 그럴 때면 낮게 깔린 수의사의 눈과 그만하면 됐다는 김 선생의 말, 그리고 무리지어 수술실을 나서던 뒷모습들이 지오를 스쳐 갔다. 지오는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유리문 안쪽에 서 있었다. 마지막에는 적막한 공간에 수의사와 둘만 남았다. 수의사는 말없이 수술대 위를 정리했다. 더는 지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김 선생은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대 근처에 서는 어른들은 모두가 비슷한 말을 했다. 동의할 수 없었지만 같은 장면을 목격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을 때 지오는 십대 자원 활동가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수의학과를 목표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돼지 만화를 그리는 시유처럼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이 없는 날이면 센터에 나와 김 선생을 도왔다. 사료를 가져다주고 밧줄을 잡아주고 올가미와 붕대와 테이프를 자르고 수술실 계류장을 청소했다. 동물의 재활에 필요한 기술도 어깨너머로 하나씩 배웠다. 김 선생은 아예 관리 예산을 빼서 만 열아홉 지오가 돈을 받고 출근할 수 있는 서류를 마련했다. 개인 업무를 돕는 보상으로 수학과 영어 공부를 봐주기도 했다. 야간 수의학 대학원을 다니는 김 선생 덕에 지오는 벌써 대학생 조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누렸다. 센터와 학교 연구실을 오가며 일과 공부가 한 덩어리로 뒤섞였다. 그러던 중 지오는 김 선생으로부터 특별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나 제안 받았고, 그 일을 맡으면서 더 이상 구조센터의 안락사에 방방 뛰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혈관에 염화칼륨을 주입하는 수술실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동물의 시체는 새 아르바이트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죽음을 보는 일이 너무나 빈번했다. 오늘 죽는 멧돼지는 성질이 거칠어 이곳에서는 핸들링이 어려운데다, 국가가 지정한 유해 조수에 포함되어 있어 차라리 다행이라고, 지오는 생각했다.
우린 할 만큼 한 거죠 뭐.
지오는 신입 활동가 누나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김 선생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고 생각했다. 수의사가 죽이기로 했다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누나를 수술실로 보내지 않는 것이 지금 지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산책 삼아 누나와 사무동 건물을 크게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누나와 하나씩 나눠들자 센터장이 희망이라고 이름 지은 백구가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누나는 줄곧 땅을 보고 걸었다. 대화가 끊길 때마다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것 말고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았다. 누나? 하고 부르면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웃어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오는 말없이 걷는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뒤쳐져 걷던 누나와의 거리가 티 나지 않게 조금씩 줄어들었다.
수의사와 김 선생은 두 사람이 수술동 맞은편 화단을 지날 때 나타났다. 못 본 척 커피를 마시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바닥에 발을 끄는 누나의 신발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있는 대로 분한 내색을 하고 걷는 누나를 발견하고 수의사가 화단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왜 여기들 나와 있어?
수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벌써 끝났나요? 지오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표정 없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누나는 입을 떼지 않았다. 수의사를 지나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갔다.
저기, 매는 어떻게 해요?
지오의 물음에 수의사는 멀리 걸어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향해 대답했다. 괜찮지 않겠어? 그러고는 돼지의 죽음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호의가 누나에게 닿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매는 오늘 방사하자고. 알았지?
선생님도 확인하셨어요?
지오가 이번에는 김 선생에게 재차 물었다. 이제 날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다친 부위 말고 다른 곳도 살펴봤는지, 오전에 힘들어하던 착지는 그들의 심사를 통과했는지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수의사는 한 발짝 떨어져서 둘의 대화를 들었다. 눈동자는 의아하다는 듯 지오와 김 선생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왜 그래? 바라던 거 아니야?
수의사가 거듭 말끝을 올렸다.
방사 가능하다며?
그 말에 김 선생은 지오를 쳐다봤다. 지오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미적거렸다.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고 급한 일이 떠오른 것처럼 다리를 움직였다. 괜찮을 거야,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지오의 혼잣말은 시유와 함께 살면서, 애정을 주고받으면서 고쳐졌다가 다시 문득문득 튀어나왔다. 괜찮아, 하고 오랜 입버릇이 나오려 할 때면 지오는 의식적으로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닥에 턱을 괴고 누워 있던 백구가 지오를 따라올 것처럼 일어나더니 수의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백구의 움직임을 의식하던 지오는 얼마간 정면을 향해 걷다가 사무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오는 주변을 살피며 다시 흙길로 걸어 나왔다. 돌계단 위에서 내려다보자 두 사람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계류장까지 가는 길 내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올라갈수록 나무 그늘이 짙어졌고, 사료 통을 들고 이곳저곳을 오가던 활동가 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철조망 내부만 오전과 같았다. 매는 여전히 횃대 위에 가만히 앉아서 지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고리를 풀고 안으로 들어간 지오는 사무실 캐비닛에서 몰래 챙겨온 추적기를 품에서 꺼냈다. 수의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매의 등허리에 추적기를 달고 싶었다. 일단 기기를 달면 방생은 확정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센터는 숫자 몇 개로 간편하게 매를 추적할 수 있었다. 홀가분해야 했다. 분명 마음이 가벼워야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애매모호한 감정이 추적기를 꺼내 든 손을 자꾸 아래로 끌어내렸다. 보수 도구를 담아둔 유리통에 지오와 매의 실루엣, 그리고 울타리 너머 하늘의 구름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지오는 고개를 까닥거리는 매와 눈을 맞추고 괜히 보관함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기어이 돼지와 매의 운명을 가른 자신의 거짓 문자를 생각해냈다. 지오는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고 마음먹었다. 매를 날려 보내기 전에 한 가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장면이 남아 있었다.
줄에 매달린 장난감 쥐는 여전히 점퍼 주머니 속에 있었다. 쥐를 꺼내 들자 실리콘 몸체에 든 플라스틱 알갱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쥐를 허공에다 힘껏 던져보았다. 소리에 관심을 보이며 주위를 돌던 매가 발톱으로 쥐를 낚아채 구조물 위에 앉았다. 지오는 기꺼이 밧줄을 잡아 당겼다. 쥐를 거두어들인 뒤에 알갱이들을 흔들고 다시 공중에 던졌다. 울타리, 구조물, 그다음에는 매의 몸통을 향해 쥐가 날아갔다. 어깨가 아플 때까지 계속 던졌지만 첫 시도처럼 매가 사냥에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지오가 던진 장난감 쥐는 매의 부리나 발톱을 스치고 마지막에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
구조센터는 군데군데 깨지고 움푹 파인 아스팔트 도로와 비포장 길을 모두 지나야 출입이 가능했다. 센터에 출입하는 자동차 바퀴와 직원들의 신발은 성한 데가 없었다. 지오는 앞코 가죽이 허옇게 벗겨진 자신의 등산화를 내려다보았다. 지오가 밟고 서 있는 창고 앞마당은 아스팔트였지만 왼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벌겋게 흙이 드러나 있는 야산이었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지오는 샛길을 타고 올라가 산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건조한 흙길 위에 낙엽이 쌓여 미끄러웠다. 신나무 낙엽이 두텁게 깔린 산중턱을 걷는데 면적이 넓은 상수리나무 잎사귀가 낙하산을 펼친 것처럼 아래로 내려왔다. 누런 낙엽들 사이로 빨갛거나 미처 익지 못해 푸르스름한 잎들이 알록달록하게 섞여들었다. 사람이 가지 못하는 길 위에선 새들이 낙엽을 밟아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비좁은 샛길을 계속 들어가자 굵은 회색빛 나무줄기에 사유지라는 경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옆으로 나 있는 비탈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목적지였다. 지오는 가장자리가 헤지고 떨어져나간 안전띠 밑으로 몸을 숙이고 깊은 산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갔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 거칠어진 무덤을 지나자 작은 공터가 나왔다. 하얀 평지 위에 집을 짓다만 철골 구조물이 보였다. 철골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완성 집은 처음 지오가 공터를 발견했을 때부터 나무판자, 공사용 흙더미들과 함께 몇 해째 방치된 채였다. 지오는 이따금 집터에 서서 구조물의 사연을 상상해 보았다. 누군가 선산에 집을 짓다가 건축업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해 공사가 중단되었다든가, 건강한 노인이 건축을 얕보고 혼자 집을 세우려다 결국 뒤편 무덤에 묻혀 있다든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철골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려앉은 천막 아래서 고양이 두 마리가 지오에게 다가왔다. 과거가 어떻든 방치된 구조물은 지금 초대형 캣타워로 이용되고 있었다. 센터에서 가지고 온 참치 캔을 그늘에 따주고 근처 흙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지오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쉬고 싶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낡은 집터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복잡한 심경이 조금은 나아졌다.
지오는 집에서 싸온 샐러드 김밥을 꺼냈다. 늦은 점심이었다. 바닥에 앉은 채로 대강 호일 끝부분만 열고 김밥 한 개를 입에 넣었다. 전에 시유가 가르쳐준 대로 말았는데도 함께 먹던 맛이 나지 않았다. 같이 만들었던 소이 마요네즈가 상하기라도 했는지 혀에서 시큼한 맛이 났다. 시유가 공유했던 채식 폴더에서 김밥 레시피를 확인했다. 물기를 짠 두부, 당근, 우엉, 오이와 로메인 상추까지, 만드는 과정에서 빠뜨린 재료는 없었다. 지오는 입안에 굴러다니는 텁텁한 밥알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꼬리만 먹고 남은 김밥은 다시 알루미늄 호일로 감쌌다. 산에서 먹는 점심은 언제나 짧게 끝이 났다. 간식거리를 찾아 가방을 뒤졌지만 가지고 나온 음식이라고는 이미 고양이들을 위해 꺼낸 참치 통조림이 전부였다.
휴대폰 진동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간식을 나눠 먹으려는 활동가 형 누나들이 그룹 채팅창에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오는 언젠가 회식을 마치고 집에 김 선생을 데려간 날 이후로 대부분의 식사를 혼자 했다. 두 번의 술자리를 계기로 다른 직원들과 나누는 음식도 대화 주제도 왜인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날 회식은 기간제 근로 자격을 얻은 지오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지오의 말에도 김 선생이 사람을 불러 모으겠다고 먼저 나섰다. 김 선생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들이 센터 근처 터미널로 모여들었다. 원래는 사무실 직원들끼리 보기로 했던 약속이 자원 활동가들까지 하나둘 합류하니 금세 열 명이 넘어갔다. 매주 센터 안에서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밖에서 따로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오는 오토바이를 바깥에 대놓고 터미널 벽시계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차를 가져온 동료들은 이미 모두 모여서 진지하게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터미널 근처에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앉아서 먹을 만한 식당은 고깃집 아니면 감자탕집이 고작이었다. 고기를 먹자는 사람이 반, 감자탕이 반의 반, 나머지는 둘 중에 아무거나 먹자고 했다. 고기가 없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 모임에서 고기를 빼자는 말은 나머지 사람 모두의 배려를 요구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오가 휴대폰으로 고기 없는 음식점을 검색해본 것은 시유가 보낸 메시지 때문이었다. 곧 식당으로 이동할 것 같다는 말에 시유는 대답 대신 갓 완성한 돼지 만화의 스케치를 사진으로 보내왔다.
─“나보다 우월한 인간만 우리를 먹어라.” 돼지가 괭이를 들고 두 발로 서서 외쳤다.
시유가 보낸 첫 번째 컷은 고지능 돼지가 무기를 빼앗아들고 농장 주인에게 맞서는 장면이었다. 위풍당당한 등장 신에 돼지를 감싸는 배경선을 추천했던 사람은 지오였다. 주인공 돼지의 아이큐는 인간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 사료 통에 깔려 있는 신문을 읽다가 말과 글을 깨치고, 세상을 알고,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녀석이니까, 돼지의 대사는 사실상 어느 인간에게도 먹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음 컷에서는 돼지우리를 박살내고, 돼지 군단과 농장을 탈출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제 어디로 가지?” 주인공 돼지를 뒤따라온 돼지가 물었다.
─“저걸 타자.” 주인공 돼지가 냉동 탑차를 가리켰다.
─“몰 줄 알아?” 돼지들이 차로 달려가면서 외쳤다.
─“일단 타 봐.” 주인공 돼지는 운전석으로 올라타 마구잡이로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하는 거더라, 봐둔 적이 있는데…? 돼지의 생각 풍선이 바쁘게 움직이는 앞다리 한쪽을 가렸다.
─“부르릉” 시동이 걸리고 차가 앞으로 나갔다.
─“위잉” 짐칸에 냉각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게 우리를 냉동 삼겹으로 만들려고 하나!” 돼지들이 한 데 뭉쳐 앉으며 소리쳤다.
─“미안. 에어컨을 틀어본다는 게…” 주인공 돼지가 버튼을 몇 개 누르고 황급히 핸들을 돌렸다.
지오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흘리고 손가락으로 한 컷씩 사진을 넘겼다. 고지능 돼지는 길을 가던 도중에 나뭇가지로 초보 글자를 만들어 짐칸 문에 붙이고 도심으로 차를 몰았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켜자 농장주의 최근 목적지 목록이 떠올랐다. 돼지들의 목적지는 목록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 정육 창고였다.
─“이것들 뭐야?” 가죽 앞치마를 입은 정육점 주인이 차에서 내리는 돼지들을 보고 외쳤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잘 알아.” 돼지가 괭이를 들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주인은 황급히 창고에서 정형 칼을 가지고 나왔다.
─“내가 할게.” 돼지가 주인과 일대일로 마주섰고 다른 돼지들이 복싱 링을 만드는 것처럼 둥그렇게 둘을 둘러쌌다.
돼지의 눈높이를 의도한 건지 정육점 주인을 그린 것은 대부분 로우 앵글이었다. 덩치 큰 중년의 사내가 돼지에게 발길질을 하고 칼을 휘둘렀다. 위기에 처한 돼지가 칼을 막기 위해 괭이를 치켜든 순간 괭이가 남자의 허벅다리를 푹 찔렀다.
지오는 클로즈업 그림으로 표현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면서 단순한 그림체 너머에 있는 시유를 생각했다. 너무 과한 장면은 아닌지 메시지를 보내려다 관두었다. 만화를 본 사람들이 간혹 악성 댓글을 달았지만 그럴수록 시유는 더욱 발칙한 장면을 그려내 그들의 손가락을 민망하게 만들곤 했다.
처음부터 지오가 시유의 채식에 동참한 건 아니었다. 옆에서 고기를 구우면 한 번쯤 시유가 젓가락을 들겠지 기대하던 시절도 솔직히 있었다. 채소를 구운 프라이팬에 따로 삼겹살 한 줄을 굽거나, 된장찌개를 끓인 다음 먼저 시유의 대접에 덜고 차돌박이를 넣어 한 번 더 끓여내는 일이 성가시게 느껴질 때쯤 지오는 진지하게 채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도 고기를 좀 줄여볼까, 하고 말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 고기를 구울 때마다 시유의 밥그릇에 남겨져 있는 밥을 보고, 새삼 시유가 꽤 오랫동안 고기 냄새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날이었다.
시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존 로빈스의 책 『음식 혁명』을 읽고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둔다든가, 『왓 더 헬스』, 『도미니언』 같은 다큐멘터리를 노트북으로 다운 받아 거실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보는 정도가 시유가 한 행동의 전부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슈퍼 돼지 영화 『옥자』를 몇 번이나 보면서는 그냥 만화에 참고할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지오는 우선 냉동실에서 돼지부터 모두 치웠다. 개인 접시에 닭과 생선을 놓는 빈도가 줄고 점차 시유가 차리는 비건 음식에 익숙해졌을 무렵 지오는 그동안 어떻게 자신을 채근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시유에게 물어보았다.
해치고 강요하지 않으려고 채식하는 거니까.
시유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힘들지 않았어?
언젠가는 같이 해줄 거라고 생각했지. 반드시 같이 할 필요는 없지만.
전도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그날 저녁 지오는 자진해서 템페를 굽고, 볶은 채소에 귀리 음료를 부어 버섯 리소토를 만들었다. 대단한 음식처럼 먹어주는 시유를 보는 것이 좋았다. 시유는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놓고 휴대폰을 가지고 와 그동안 수집한 채식 레시피 폴더를 보여주었다. 패스트푸드부터 슬로푸드까지, 시유가 찍어놓은 음식 사진은 삼백 장이 넘었다. 전부 다 먹어보자, 지오는 시유와 마주 앉아서 말했다. 함께 앉는 식탁에서 채식 메뉴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결국 구조센터 직원들은 터미널 앞 돼지고깃집을 선택했다. 테이블 세 개를 이어붙인 자리에서 지오는 김 선생과 같은 줄 맨 끝자리에 앉았다.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하얀 접시에 쌓여 있던 선홍빛 고기들이 숯불 위로 올라갔다. 비계가 너무 많지 않느냐고 누군가 말했지만, 숯에 구우면 기름이 빠질 거라는 김 선생의 말에 모두가 불평 없이 고기를 집었다. 처음 석쇠에 올린 세 줄의 고기는 젓가락질 몇 번에 사라졌다. 옆자리에 앉은 세 살 터울 활동가 형이 유독 지방이 많이 붙은 고기를 집어 석쇠에 올렸고, 이내 기름이 떨어진 자리에서 검게 그을린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연기는 하필 지오가 앉은 자리로 향했다. 몸을 조금 틀어 앉았지만 기름이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오는 등받이에 힘을 주어 의자를 살짝 뒤로 밀었다.
지오와 같은 줄에 앉은 김 선생은 대학원에서 쓰고 있는 박사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고기를 입에 넣은 채 말하는 김 선생의 옆얼굴이 지오의 시야에 들어왔다.
수정 요청이 자꾸 들어와서, 그게 제일 힘들지.
높은 점수대 저널은 확실히 까다롭게 보나요?
김 선생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물었다.
그렇긴 한데. 하다보니까 리뷰어마다 원하는 방향이 있는 것 같더라고.
그게 뭔데요?
요새 트렌드는 역시 동물 자체보다는 인간 질병하고 연결 짓는 거겠지.
김 선생은 질문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두루 쳐다보며 대답했다. 김 선생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저마다 예시를 하나씩 들어 보이며 김 선생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지오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수의학과에 합격한다 해도 구체적으로 해보고 싶은 연구가 아직은 없었다.
활동가 형이 추가 주문한 삼겹살이 나왔다. 새 접시를 지오 앞에다 내려놓은 종업원은 겉면이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잘라 석쇠 가장자리에 두르고, 바로 올려드려요? 하고 선홍빛 고기를 가리켰다. 지오는 고개를 저은 뒤에 다른 테이블의 불판을 확인했다. 그러다 나란히 앉아 있는 김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왜 더 안 굽고? 많이 먹어.
먹고 있어요.
지오는 기름진 파절이 접시를 들어 김 선생에게 보였다. 돼지기름에 볶은 김치와 콩나물이 보호색처럼 섞여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파 말고 고기 말이야. 무슨 채식이라도 하냐?
김 선생이 건넨 건 살가운 농담이었지만 지오의 마음은 잠시 동안 어수선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고기를 먹은 뒤였다. 살코기 한 점을 입에 집어넣은 순간부터 줄곧 거부감 없이 삼겹살을 삼켰다. 집에서 시유와 채식을 한다고 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털과 잉크가 남아 있는 돼지껍데기를 보고 비위가 상한다든가 고기 굽는 냄새가 역겨워진다든가 하는 일은 지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씩 해보고는 있는데요.
지오는 어수선한 마음을 거두려고 그렇게 말했다. 채식을 한다는 말에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모두 지오를 쳐다봤다. 김 선생이 그들을 대표해 지오에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럼 다른 데 가자고 하지?
아뇨, 저는 플렉시테리언이라고…… 평소에는 채식을 하다가 가끔 고기를 먹어도 되는 거라서…….
지오는 종업원에게 했던 것보다는 완곡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젠가 시유는 사람이 일주일 중 하루 채식을 하면 바뀌는 것들을 나열하며 플렉시테리언이라는 단어를 소개했다. 연간 몇 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가 감소하고, 몇 리터의 물이 절약되고 하는 말들은 아마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가끔씩 고기를 먹는 플렉시테리언 역시 엄연한 채식주의자의 한 축이라는 말을 지오는 진심으로 믿었다. 그리고 삼겹살집에 앉아 그 단어를 말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특히 자신에게 알맞은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오는 채식주의자를 욕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반감을 사지 않으려고 그 멋진 말을 선택했다. 마침 마주앉은 사람이 자기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며 거들었고, 건강 때문에 특별한 날에만 고기를 먹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 덕분인지, 사람들은 이해가 수월해진 표정이었다. 다만 지오는 먹어도 된다고 표현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고기를 허락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서 그랬다.
너는 조금 유연하게 하겠다는 거네?
옆자리 형이 말했다. 형은 집게로 불판 가장자리 고기들을 집어 같은 테이블 사람들 앞에다 놓았다. 지오의 파절이 위에도 잘 익은 고기 한 점이 놓였다.
사람들은 갑자기 채식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연하다는 형의 말 때문인지 그들은 마치 지오를 채식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대했다. 채식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대체 식물은 어떻게 먹는 거야? 풀은 생명이 아닌 거야? 어차피 동물도 이미 죽은 애들만 먹는 거잖아, 하는 보편적인 공격들은 지오가 아니라 그곳에 없는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지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제대로 반박하자니 스스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도 섞여 있어서 조용히 위아래로 고개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 사람들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라는 말만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지오의 신경을 건드렸다. 김 선생의 직속 후배인 젊은 관리사는 아예 자세를 고쳐 앉고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매형이 안성에서 한우 뷔페를 하거든요. 얼마 전에 무슨 단체가 와서는 주차장에서 피켓을 들고 난리를 피웠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자기들만 특별해서 남을 가르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요. 채식을 하고 싶으면 조용히 할 일이지 왜 남을 괴롭히고 피해를 주느냐고요.
관리사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하듯이 지오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오를 공격하려는 시선은 아니었다. 비난은 지오를 넘어 어쩌면 지오가 이미 닿았거나 앞으로 닿을지 모르는 영역에 효과적으로 미쳤다. 지오는 최대한 태연하게 시선을 받아넘기는 동시에 속으로는 시유를 생각했다. 그동안 시유가 의도적으로 보여주었거나 함께 살면서 자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모습들을. 지오의 주변에 상주하던 텍스트와 이미지들, 강요하지 않으려고 채식을 한다는 말과 목소리와 시유가 혼자서 차분히 식단을 지키던 시간들을. 지오는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로 뭉치거나 붙잡지 않고 천천히 흘려보냈다. 그리고 시유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상상해보는 것으로 관리사의 눈길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하늘빛이 캄캄했다. 서둘러 귀가하려는데 술에 취한 김 선생이 지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지오네 집에 가서 한 잔 더 마시면 딱 좋겠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활동가 형도 바짝 따라붙었다. 은근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가도 되겠느냐고 메시지를 보내자 시유는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계산대 앞에 몰려 있는 일행과 잠시 떨어져서, 지오는 집에 있는 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럼 우리 물건들 좀 치워놔 줄래?
집 깨끗한데?
시유는 지오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 여행 사진이나 커플로 산 물건들 있잖아.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지오가 사촌 누나와 함께 사는 줄만 알았다. 집을 구할 때 두 사람이 합의한 대로였다. 가출 팸 출신끼리 눈이 맞아 같이 산다는 걸 굳이 밝히지는 않아도 된다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시유였다. 동물 구조센터나 배달 가게에 지오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오는 계산대 앞으로 돌아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점퍼에 탈취제를 뿌렸다. 나란히 선 사람들도 지오를 따라 외투에 밴 고기 냄새를 죽였다. 하나둘 식당을 떠나고 남은 세 사람은 김 선생의 차에 앉아 대리 기사를 기다렸다. 좁은 공간에 모여 앉으니 탈취제 냄새가 차 안에 진동했다. 점퍼 옷깃을 젖혀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면 라벤더 향에 섞인 고기 냄새가 올라왔다. 창문을 열고 옷을 벗어 공기 중에 털었다. 화학약품과 섞인 기름 냄새는 옷을 털면 털수록 옅어지지 않고 강하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집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걸레질이라도 한 것처럼 바닥이 깨끗했다. 아침까지 현관에 놓여 있던 커플 운동화, 냉장고에 붙여 놓았던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들도 보이지 않았다. 시유는 방에서 나와 지오의 손님들에게 인사한 다음 모두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올 때까지 서서 기다렸다.
누난 뭘 청소까지 했어?
미안한 마음에 공연히 무뚝뚝하게 물었으나 시유는 지오의 등을 툭 치고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들어가서 일을 보겠다, 재차 인사를 건네고는 방으로 들어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의 틈만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시유는 고지능 돼지 만화의 정식 연재처가 정해져 마감일마다 채색 작업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따금 지오가 나서 배경 채색을 도왔지만 매주 일정이 빠듯했다. 지오는 맥주나 조금 내주고 사람들을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문 가까이 서서 문틈을 넓히자 책상 의자에 앉아 머리에 헤드셋을 끼는 시유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틈에 살짝 얼굴만 집어넣은 채 시유에게 말을 걸었다.
금방 마무리하고 도와줄게.
시유는 지오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음악을 크게 틀었는지 바닥에 뻗은 발을 까닥거리며 마우스만 움직였다.
지오의 뒤에서는 김 선생이 집 앞에서 사온 과자 봉지를 뜯었다. 맥주는 냉장고에서 지오가 꺼내왔다. 이미 많이들 마셨기 때문에 일단 한 캔씩만 꺼내보기로 했다. 거실 한 가운데 상을 펴놓고 남자 셋이서 캔을 부딪쳤다. 동물 이야기로 시작해 센터에서 있었던 일로 화제를 옮기자 금세 손님들의 맥주 캔이 비었다. 배를 벌린 채 널브러져 있는 과자봉지도 바닥을 드러냈다. 마침 화장실에 다녀온 김 선생이 모자란 술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린 사람들이 잘 해놓고 사네.
김 선생은 맥주 캔을 꺼내 들고 말했다. 부엌을 건너온 김 선생의 시선은 거실을 지나 불 꺼진 옷 방에 잠시 머물렀다. 사촌 누나가 깔끔한 스타일인가 봐? 하는 말소리를 못들은 체하며 지오는 주방 건조대에 있는 커플 머그컵을 쳐다보았다. 그다음엔 김 선생을 따라 눈으로 옷 방을 빠르게 훑었다. 창을 두고 좌우 벽에 딱 맞게 짠 행거에는 다행히 시유가 신경 써서 치웠어야 할 물건은 없었다.
너 잠은 어디서 자?
다시 김 선생이 물었다. 그제야 지오는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시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더블 사이즈 침대가 있는 두 사람의 보금자리는 안방 문이 거의 닫혀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지오는 매일 밤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것처럼 등을 대고 누워 보였다. 거실이 편하다고 말한 뒤에는 공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소파에 누워보라고 했다. 김 선생이 소파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지오는 일어난 김에 부엌으로 가 자신의 머그컵에 물을 받았다. 활동가 형이 찬물을 달라며 지오를 쫓아왔다. 지오는 시유의 컵에 물을 받아 건넸고, 그러다 문득 애인 사이가 아니어도 컵 세트 정도는 같이 쓸 수 있는데 과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유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귀찮고 성가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무턱대고 사람들을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 디자인과 색이 같은 커플 운동화를 치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지오는 뒤늦게 시유의 입장을 헤아려보려고 애썼다.
형은 컵을 다 비우고도 부엌을 기웃거렸다. 시원한 물을 마시니까 이제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형이 냉장고 문을 열자 거실에 있는 김 선생도 관심을 보였다. 짭조름한 것 좀 있나? 김 선생이 물었고, 예를 들면 어떤 거요? 형이 대답했다. 소시지나 만두 같은 거? 김 선생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채 다시 묻자 냉장고 안을 살피던 형이 거실을 향해 말했다.
풀떼기 밖에 안 보이는데요?
목소리가 컸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헤드셋을 벗었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굳이 문 앞으로 다가가 확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오는 부엌에서 턱으로 안방 문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가 채식을 해서.
사실 집에서는 시유의 식생활에 꽤나 동참하고 있었지만 지오는 거리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저녁을 고깃집에서 먹어놓고 같이 완전한 채식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오가 냉동실 문을 열어 손님들이 만족할 만한 음식을 찾는 동안 거실과 부엌에서는 채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어떻게 채소만 먹고 살지? 치즈 같은 것도 없어? 치즈는 왜 안 돼? 형이 궁금증을 쏟아내자, 자기들끼리 나눠놓은 등급이 있어, 생선은 된다 닭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유제품까지 안 먹으면 완전 강성인 건데, 하고 김 선생이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형은 치킨만은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돼지는 참아도 닭은 못 참을 것 같다는 형의 말을 자르고 김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키운 동물인지를 봐야지, 무작정 안 먹는다고 좋은 건 아니거든. 필수 아미노산은 동물성 단백질이 월등하다는 연구도 있고.
김 선생의 마지막 말은 오롯이 지오에게로 향했다.
같이 사는 네가 고생이겠다.
지오는 계속해서 냉장고를 뒤졌지만 냉동실에서도 마땅한 안주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싱크대 하부 장을 열자 각종 양념 통들 옆에 시유가 사다놓은 채식 라면이 보였다. 라면만큼은 모두가 반겼다. 지오는 커다란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 세 개를 끓였다. 하부 장에는 두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것 말고 특별한 날 꺼내자고 시유가 사놓은 그릇들도 있었다. 상에 라면을 올려놓고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시식하듯이 각자 그릇에 덜어서 라면을 먹었다. 채식 라면이라 그런지 괜히 좀 심심한데요, 형이 그릇을 비우고 말하자 이번에도 김 선생은, 맛은 비슷한 것 같은데 성분을 봐야 해, 봉지 좀 가지고 와 봐, 하고 대화의 방향을 조금 틀었다.
진짜 고기는 하나도 안 들어갔나? 고기 맛 흉내 내겠다고 때려 넣는 첨가물이 몸에 더 안 좋아. 그걸 알아야 돼.
라면 봉지를 받아 든 김 선생이 두 사람을 가르치듯 말했다. 식품 성분표를 자세히 확인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 선생은 뒷면에 인쇄된 작은 글자들을 대강 훑어보는 것 같더니 이내 봉지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 개인 접시를 입에 가져다 대고 면발과 국물을 한입에 후루룩 빨아들였다.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냉장고에 사 두었던 술은 소주까지 완전히 동이 났고, 손님들은 택시 할증이 풀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지오는 시유의 채색 작업을 도와주지 못했다. 냄비와 그릇을 대충 싱크대에 넣어놓고 안방 문을 열자 홀로 작업을 끝낸 시유가 거실로 나왔다.
시유는 집에 남아 있는 고기 냄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환기만 시킬 뿐 냄새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아 지오를 답답하게 했다. 지오가 옷 방에서 옷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시유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은 조언 좀 들었어? 공부 가르쳐주는 사람이라 데려온 거잖아.
시유가 하는 말은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직설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해? 진짜 도움이 되는 사람이야? 뜬금없이 묻거나, 그냥 네가 필요 이상으로 잘하는 것 같아서, 하고 말을 돌리는 식이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삼겹살 냄새 때문이 아닐까, 지오는 생각했다.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선생님이 꼭 삼겹살집에 가야 한다고 해서. 축하하는 자리라서 그렇다나 뭐라나.
내가 고기 먹는 걸로 뭐라고 한 적 없잖아. 왜 그런 말을 해?
시유는 그제야 알아듣기 쉬운 말을 꺼냈다.
그 사람한테 왜 그렇게 하는 건데? 네가 가기 싫으면 안 가겠다고 하면 됐잖아.
지오는 곧고 정직한 시유의 시선을 겨우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삼겹살집에서 관리사의 말을 들을 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해보려고 노력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입을 헹구고 거울을 보는데 새 옷에서도 머리카락에서도 여전히 고기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2
구조센터를 빠져나온 것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뒤였다. 지오는 지상 주차장 계단을 내려오다 무언가 뒤를 잡아끄는 느낌에 구조센터를 올려다보았다.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일합니다, 쓰여 있는 현수막 너머로, 그 안에 속해 있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호감을 보장하던 구조센터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구조센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보통 좋은 일 하시네요, 말했고, 그 포장 덕분에 지오는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반나절 안에, 단지 말 한 마디에 돼지는 죽고 매는 살았다는 사실, 이제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센터의 모순이 새삼 지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오는 죽은 돼지보다는 살아나간 매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새장에 넣고 자루를 씌운 매의 머리, 시야를 가리자 차분해지던 날개, 가락지를 채운 발목, 지피에스 추적기를 부착한 등…… 지오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케이지 속 개체를 눈에 담으며 익숙한 은행나무 숲으로 향했었다. 계절이 바뀌는 사이 누렇게 갈변한 나무 숲. 절에서 벌목을 했는지 푸석하고 비탈진 땅에 가로로 누워 있는 나무줄기들이 김 선생과 지오의 산행을 방해했다.
탁 트인 땅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지오는 김 선생보다 앞장서 숲에 숨겨진 덫이 있는지 살폈다. 쇠막대기로 나무를 훑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지오는 매끈하게 잘린 나무 밑동부리를 밟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게 벌어진 나무들 사이로 서쪽으로 넘어가는 노란 햇살이 비쳐 들었다. 새장 문을 열고 매의 얼굴을 덮어두었던 자루를 벗겼다. 무거운 새장이 쓰러질 정도로 움직이던 매는 두 사람이 말릴 새도 없이 바닥을 치고 해가 떠 있는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지오는 발을 접고 날아가는 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땅과 수평하지 못한 오른쪽 날개를 보면서는 매가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더 이상 매를 위해 거짓말하고 숲까지 나와 먹잇감을 던져줄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는 점과 숫자들이 매의 일상을 보고할 것이다. 좌표의 움직임이 멎었을 때 다시 숲을 뒤져서 시체를 거두고 추적기를 회수하는 것 정도가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하나라도 살려서 좋겠구나.
김 선생이 센터로 돌아오는 차 운전석에서 말했다. 지오는 잠시 눈길을 돌려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는 빈 새장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거 맞죠,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센터에 도착해 퇴근 준비를 하면서였다. 답은 저녁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시유에게 전화해 대신 괜찮다고 말해주는 목소리라도 듣는다면 정말 괜찮을 것 같은데 선뜻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두커니 주차장 계단에 서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활동가 형 누나들이 지오를 지나쳐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안 갔어?
위에서 지오를 부르는 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 선생은 서류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외투를 고쳐 입으면서 지오에게 다가왔다.
알지? 똑같이 그 학교 앞으로 가면 돼.
오늘도 같이 안 가세요?
이제 나 없어도 되잖아? 물건은 그 사람 통해서 보내고.
김 선생은 지오의 등을 떠밀고 계단을 내려갔다. 몸에 힘을 줘 제자리에서 버텼다. 이런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가자니 마음이 더욱 내려앉았다. 더는 구조센터 건물을 돌아보는 마음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오는 유독 가파르게 느껴지는 계단 마지막 한 칸을 겨우 내려왔다. 그리고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어두컴컴한 주차장 구석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은 언제나 똑같았다. 칼 가게를 향해 달렸던 지방도로를 되돌아가 어두침침한 시골길을 달리는 경로. 울퉁불퉁한 흙길에 들어서자 오토바이 바퀴에서 어김없이 자갈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오토바이를 세우고 고글과 이어폰을 착용했다. 라디오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마지막 파일을 재생하자 몇 분 전에 녹음된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구름 낀 저녁이지만 밤사이 비 소식은 없다고 했다. 다만 점차 짙어지는 안개에 주의하라는 기상 캐스터의 말에 지오는 너무 늦지 않게 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미진 비포장도로는 가로등불이 두 개 건너 하나씩만 들어왔다. 좌우는 불빛 하나 없는 논밭이었고 전방은 구조센터에서 시작된 야산의 능선들이 시커멓게 둘러쳐져 있었다. 자주 달리는 길이었지만 잊지 않고 안개등을 켰다. 아래쪽까지 빛이 들어와 흙바닥에 깔린 돌 알맹이들이 보였다. 오전에 속도를 내 달렸던 도로 위에서 지오는 조심스럽게 두 바퀴를 몰았다.
불 꺼진 신호등을 여러 개 지나쳐 조용한 마을에 진입했다. 길가에 세워진 녹슨 표지판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알렸다. 인도 쪽으로 한 칸 들어가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 오토바이를 댔다. 바로 동업자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용한 마을이라 그런지 신호음이 귓가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세 번째 신호가 닿았을 때 지오는 볼륨을 줄이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버렸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멘트가 나올 때까지 작은 신호가 끊이지 않을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졌다.
라이트를 끄고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마주 서 있는 건물이 짙은 회색빛 실루엣으로 보였다. 약속 장소는 오래전 아이들의 발길이 끊긴 초등학교였다. 활짝 열려 있는 교문을 통해 보이는 폐교의 모습이 음산했다. 깨진 유리창이 시커멓게 속을 노출했고 축구 골대와 철봉이 사라진 땅은 자갈밭 자체였다. 버려진 운동장 한편은 그나마 주민들이 키 작은 작물을 심어 밭으로 사용하는 듯했지만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은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처럼 완전히 방치된 채였다.
담벼락을 따라 학교 뒤편으로 가면 작은 개울이 나왔다. 개울은 먼 산에서 내려와 커다란 나무에 부서지고 두 갈래로 나뉘어 흘렀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개울 근처로 난 둑길을 걸었다. 물소리와 흙에 닿는 발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평평한 돌을 딛고 서자 사방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지오를 감쌌다. 그대로 서서 휴대폰 빛을 끄고 운동화 밑바닥을 물에 적셨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면 반드시 반딧불이 하나가 빛을 흩뿌리며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빛을 밝히면 근처 풀포기에서도 미세하게 빛이 반짝거렸다. 빛은 여러 개가 산발적으로 깜빡이다가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고 한순간 사라졌다가 까만 물빛에 비치기도 했다. 우연히 반딧불을 발견하고부터 지오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혼자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넜다. 액정을 최대한 어둡게 한 다음 카메라에 불빛을 담았다. 그렇게 찍은 동영상을 시유에게 보내곤 했다.
반딧불이는 엄청 오래 껍질을 벗고 또 엄청 오래 땅 속에 머물러 있대. 성충이 될 때까지.
처음 동영상을 받은 날 시유는 같은 영상을 돌려 보다가 휴대폰을 검색해 지오에게 보여줬다.
곤충들은 다 그렇지 않아?
얘들이 특히 그렇대. 그래야 똥꼬에서 제대로 빛이 나는 걸까?
시유가 거실 불을 끄고 되물었다.
지오는 그날 어둠 속에서 빛나던 시유의 웃음과 목소리와 휴대폰 액정에 돌아다니던 작은 불빛들을 종종 생각했다. 황록색 빛에 익숙해진 눈을 한동안 감았다 뜨면 멀리 산 위로 펼쳐진 하늘에도 보일 듯 말 듯 작은 별빛이 가득했다.
날카로운 경적소리가 찌르듯 퍼졌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켠 휴대폰 불빛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반딧불이 하나둘 사라졌다. 서둘러 개울을 벗어났다. 경적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사이 두 번이나 더 울렸다. 길가로 나가자 멀리 라이트를 켜고 정차 중인 동업자 아저씨의 차가 보였다. 상향등이라도 켰는지 새하얀 인공조명이 교차로 표지판까지 닿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지오는 오토바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동업자 아저씨의 차로 옮겨갔다. 아저씨의 더블 캡 운전석에는 그가 차군이라고 부르는 운전수가 앉아 있었다. 차를 몰아서 차군인지 성이 차 씨여서 차군인지는 물어보지 않아 몰랐다. 차군과 지오는 서로 부를 일이 없어 따로 호칭 정리가 필요하지 않은 사이였다. 차군에게 운전대를 맡긴 아저씨는 뒷좌석 오른쪽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차 안이 온통 담배 찌든 냄새로 가득했다. 지오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올라타 잠시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공기를 뱉었다. 자동차 구석구석 배어 있는 쩐 내를 단번에 들이마시면 속이 메슥거렸다. 차문을 닫자마자 창문을 맨 아래까지 내렸다. 아저씨의 손이 운전석 시트를 두 번 치자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앞으로 움직였다.
김 선생은 안 온다하대?
꽁초를 창밖에 던지고 아저씨가 지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 오는 거냐고 묻는 건지 안 온다하더라는 말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오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룸미러에 비친 아저씨만 보면 차 안의 실루엣은 마치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아래위 모두 검정색 옷을 입은 아저씨는 쩍 벌린 다리 사이에 기다란 엽총을 끼고 있었다.
형님, 총 좀 내려요. 애 무서워하잖아요.
차군의 말에 아저씨 역시 엉덩이를 살짝 들어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거울에 총을 비춰 본 아저씨는 총구가 밖으로 향하게 총을 고쳐 쥐고는 걸걸하게 웃었다.
왜 그래? 좋은 일 하러 가는데.
좋은 일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지오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거 정말 좋은 연구거든.
김 선생은 낮부터 지오를 학교로 불러놓고 그렇게 말했었다. 오랜 시간 정성을 쏟고 있는 논문이 작은 문제들로 정체기에 빠져 있다고 했다. 한여름인데도 찻잔에 뜨끈한 녹차를 우려낸 김 선생은 지오에게 제안하고 싶은 알바가 있다고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신종 감염증하고 진드기를 연결 지은 거야. 산짐승이 밭에 내려왔을 때 가죽에 붙어살던 매개 진드기가 인간 서식지로 이동한다. 마지막 연결고리만 찾으면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왜 자기를 불러서 논문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했지만 김 선생의 가설은 지오가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진드기를 직접 채취해야 한다는 말까지 듣고 지오는 구조센터의 동물 시체에서 진드기를 찾아내려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센터 애들 가지고는 데이터가 안 나와.
김 선생이 지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구조한 개체들 몸에는 이상할 정도로 진드기가 없어. 고지대에서 막 내려온 애들 가죽을 벗겨서 전수 조사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제가요?
나중에 대학 와서 할 거 미리 경험하는 거지.
막 그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일단 되물었지만 지오의 머리는 입을 따라가지 못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라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못할 일 시키겠어?
김 선생이 큰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밤에 배달 아르바이트 안 해도 될 거야. 그만큼 챙겨줄게. 정규직 채용도 힘 좀 써보고.
지오는 그저 김 선생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니까.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게 아니라요.
겨우 그런 대답이 나왔다.
괜찮을 거라고, 김 선생은 거듭 말했다. 지오는 너답지 않다는 말을 곱씹었고, 더는 대꾸하지 않고 김 선생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서려는데 분수대 앞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걱정 없이 누워서 웃고 떠드는 모습에 왠지 심술이 났다. 사람이 없는 벤치를 찾아 걸어가면서 지오는 걸리적거리는 쓰레기를 걷어차고 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에 알바 하나 하자는데, 어떡할까? 돈은 배달 일보다 훨씬 많이 준다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서. 지금 선생님네 학굔데, 빨리 대답해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 하는 건데?
시유가 물었지만 지오는 답을 얼버무리고 계속 말을 쏟아냈다.
수의학과 사람들은 다들 하는 모양이던데, 이거 하고 나중에 센터에 채용되면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거겠지? 선생님처럼 돈 받고 일하면서 학교도 다닐 수 있잖아.
그러니까 하고 싶다는 거야, 하기 싫다는 거야?
대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지오는 그 뒤로도 시유가 묻는 말과 상관없는 말만 늘어놓다가 전화를 끊었다. 멍한 얼굴로 해가 내리쬐는 학교 교정을 서성거렸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바로 대답하지 못한 이유를 걸으면서 천천히 생각하려고 했다. 김 선생과 마주치지 않게 수의대 건물과 먼 곳 위주로 남의 대학 캠퍼스를 쏘다녔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다 써버리고 나서야 지오는 저녁 당번을 보러 구조센터에 출근했다. 동물 울음소리가 들리는 텅 빈 사무실이 오히려 편했다. 검정고시 문제집을 꺼내 몇 문제 풀어보고, 하루 동안 구조센터에 들어오고 나간 동물 장부를 살펴보다가, 지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김 선생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켜서 논문 파일을 찾아보고 있었다. 영어로 되어 있어 어려웠지만 대강 지오에게 말한 논문이 맞는 것 같았다. 페이지마다 다른 종류의 진드기와 동물 가죽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만 계속 들여다봐서 그런지 속이 거북했다. 지오는 바깥 공기를 쏘이기 위해 또다시 드넓은 구조센터를 배회했고, 계류장과 입원실을 크게 한 바퀴 돌아 후문에 위치한 소각장 앞에서 다리를 멈췄다. 벽 앞에 쌓여 있는 특수 비닐 더미에 플래시를 비추자 날아오르는 파리들의 몸이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지오는 제일 위에 놓여 있는 비닐을 찢어 어린 삵의 시체를 살짝 들췄다. 오후 다섯 시에 안락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삵의 가죽은 온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 가죽 가까이 휴대폰 플래시를 가져다댔다. 털 사이사이에 강한 빛을 비췄지만 밝은 빛을 되비치는 허연 속가죽만 드러날 뿐 지오가 찾는 진드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래 깔려 있는 가죽도 마찬가지였다. 동물들의 가죽은 인형처럼 깨끗했다. 진드기는커녕 피나 상처의 흔적 같은 것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계류장 근처를 서성이는 지오를 보고 김 선생은 말했다.
그 진드기들 때문에 가축 안락사도 늘어날 거야. 지금은 치료 방법이 없으니까.
못들은 척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란 것쯤은 지오도 알았다. 전날 비닐에 싸인 삵 밑에서 소각을 기다리던 두 구의 시체는 농가에서 데리고 온 개였다. 사무실 책상에는 진드기에 의한 인간 감염의 위험성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개들을 고통과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안락사 조치한다는 수의사의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김 선생은 계류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오에게 덧붙였다.
결국 좋은 일이 되는 거잖아. 알아들어?
그런 말들에 기대어 지오는 살아 있는 짐승의 가죽에서 진드기를 찾는 일이 가능해졌다. 요즘엔 아예 낮에는 구조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유해 조수의 가죽을 벗기러 다녔다. 확신이 없는 마음 상태로 처음 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오는 이제 작은 희생을 동반하는 자신의 일이 신종 질환을 유발하는 진드기 예방에 크게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거창한 생각을 종종 했다. 다행인 것은 지오가 잡는 고라니 같은 동물 역시 수의사가 센터에서 죽인 멧돼지처럼 국가가 지정한 해로운 짐승 목록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산촌으로 올라갈수록 가로등은 줄고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벌써 삼십 분을 달렸다. 삼십 분이면 슬슬 인적이 드문 경작지 부근이었고, 동업자 아저씨는 그곳에서 두 번이나 놓쳤던 고라니를 노리고 있었다. 지오는 창문을 열고 서치라이트 전원을 켰다. 빛이 레이저처럼 목표를 찾아 꿈틀거렸다. 그러다 지오의 실수로 강렬한 빛이 마주 오는 차의 전면 유리를 통과했다. 클랙슨, 손가락질, 옆으로 나란히 서서 노려보기. 낮에 트럭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아저씨는 총구를 손에 쥔 채 지오가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욕을 입에서 뭉개놓고, 창문을 내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먼저 용서를 구했다. 대장이 굴복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상대의 시력이 회복될 때까지 연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들은 차를 보낸 뒤에도 한동안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아저씨가 조금 전보다 더 낮은 데시벨로 중얼거렸다.
놀랐겠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지오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아저씨가 걱정한 쪽이 상대 운전자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아저씨는 밭을 보며 이야기했고, 차군은 미등만 켠 채 도로변에서 가장 은밀한 지점을 찾아 핸들을 움직였다. 과연, 그렇다면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지오의 서치라이트가 멀리 채소밭 위를 가로질렀다. 저거 뭐지, 하는 아저씨의 음성과 동시에 지오는 밭에서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빛을 반사한 물체가 김 선생이 연구하는 개체의 눈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지오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차문 손잡이를 당겼다. 예민하게 빛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발 한쪽을 땅에 디뎠다. 그때 다시 한 번 빛을 받은 안광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탕, 하고 아저씨의 베레타 엽총이 요란한 굉음을 냈다.
지오는 두꺼운 박달나무 가지를 들어 그것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갓 차에서 내려 총성이 울렸을 때를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오는 거듭 안광이 반짝였을 때 어쩌면 고라니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쓰러진 무언가를 향해 달려오는 내내 그 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밭은 헤드 랜턴이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빛이 조금만 먼 곳을 비춰도 구덩이에 발이 빠지고 발목까지 씌운 신발 비닐이 계속 미끄러졌다. 습기 먹은 흙냄새를 뚫고 달큼한 작물 냄새가 퍼졌다. 피 냄새는 그 아래에 육중하게 깔려 있었다. 센터에서 맡아온 냄새와는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 때문에 지오의 팔다리 털이 바짝 섰다. 피는 이전부터 농작물 밑에서 끓고 있던 것처럼 흙을 밟을 때마다 한층 강한 냄새를 풍겼다. 흔적을 따라간 땅에 정신없이 찍혀 있는 발자국이 보였다. 가슴 높이까지 오는 돼지풀을 헤치고 숨소리를 쫓는 지오의 온몸에 두려움이 번졌다. 콩잎을 서리하다 쓰러진 그림자는 묵밭으로 도망쳐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희미한 형체는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었다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라이트에 비친 둔부가 붉고 하얬다. 인간은 아니지만 고라니도 아닌 피 묻은 엉덩이. 엉덩이 주인이 둔부 위로 솟은 고개를 꺾어 지오를 바라보았다. 노루였다. 지오는 농구공처럼 튀어 오른 심장을 제자리로 쓸어내렸다. 고라니부터 인간까지, 지오의 상상 속에는 사실 노루보다 안 좋은 쪽이 더 많았다.
노루가 지오를 향해 세차게 울부짖었다. 소리가 묵밭을 넘어 농가에 닿을 것 같았다. 근처에 차를 대고 앉았을 밤의 동료에게도, 어쩌면 멀리 센터에 퇴근하지 않고 남아 있을 낮의 동료에게도 소리가 닿을 것 같았다. 금방 안도가 훑고 간 자리에 새로운 불안이 밀려들었다. 산 높이 자리 잡은 조상들이 인간 농사를 망치지 않은 덕에 노루는 아직 유해 조수 지정 동물이 아니었다. 고라니와는 다르게 포획이 불법이었다. 노루를 쏜 것이 알려지면 그깟 연구는 변명거리도 되지 않았다. 지오는 어떻게든 노루를 살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계류장에서 익힌 손길로 노루를 일으켜 세우고 최대한 다정하게 앞으로 밀어보았다. 엉덩이 한쪽에 구멍이 난 노루는 밀면 밀수록 거친 숨을 껄떡거렸고, 그 모습을 보면서 지오는 아저씨를 원망했다. 차라리 숨이 끊어졌다면 수습이 쉬웠다. 평소 몸통을 노릴 때면 연발을 쏘던 사람이 오늘은 왜 한 발만 쐈는지, 아저씨의 변덕 때문에 지오의 아르바이트가 몇 배는 어려워졌다.
마지막 힘을 짜낸 노루가 또다시 괴성을 질렀다.
나를 죽여줘.
신이 통역이라도 했는지 순간 지오에게는 비명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고통스러운 숨을 삼킨 노루가 지오를 향해 안달하고 있었다. 처음에 지오는 그 부탁을 외면하고 노루를 계속 안전한 곳으로 밀었다. 확인 사살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죽이는 건 아니야, 아저씨가 죽이고 나는 죽은 아이의 가죽을 수거할 뿐이야, 언젠가 시유가 묻는다면 거짓을 보태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박달나무 가지로 노루의 머리를 내리친 건,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될 거였다. 눈을 질끈 감고서 몇 차례 더 머리를 강타했다. 노루는 바닥이 진동할 정도로 다리를 움직이며 지오를 올려다보았다. 박달나무보다 더 단단한 것을 찾아야 했다. 흙이 손톱 사이로 파고 들 때까지 바닥을 쓸어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돌멩이와 가느다란 나뭇가지뿐이었다. 닥치는 대로 날카로운 물체를 찾아 헤매던 지오의 손이 어느새 가방에서 새 칼을 빼 들었다. 지오는 떨리는 손으로 노루의 목덜미를 잡았다. 칼끝이 뼈마디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한 감각이 파열음을 비집고 손에 스며들었다. 노루의 눈동자가 짧은 호흡과 함께 돌아갔다. 그 모습에 꼭 유해 조수가 아니더라도 일단 가죽은 확보하라고 말하던 김 선생의 얼굴이 불현 듯 떠올랐다. 초점을 잃은 지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만은 습관이 밴 것처럼 꼬리를 자르고 발목을 동그랗게 돌려 가죽을 벗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근처에 다른 노루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지오는 초식 동물처럼 상체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밭에 자란 풀 위로 솟아오른 귀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노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풀숲 사이로 빛을 비추자 기다란 그림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피 냄새를 맡은 들개가 몸을 낮추고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새끼를 잃어버린 멧돼지가, 굶주린 미지의 짐승이 웅크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생각. 지오는 헤드 랜턴을 끄고 자세를 정비했다. 혹시 제 뒤에 뭐 있어요? 하고 소리쳐보았지만 아저씨의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칼끝은 노루의 뼈마디에 단단하게 박힌 상태였다.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지오의 목덜미에 닿았다. 신음을 뱉으며 팔을 휘저었다. 큰 날벌레의 날갯짓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날벌레 몇 마리와 지오의 팔뿐이었다. 칼을 뽑아 저항해야 할 만큼 위험한 짐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오는 눈을 감고 칼자루를 비틀었다. 내장을 비우려면 항문을 절개하고 배까지 길을 내야 했다. 암순응이 찾아와 조명을 켜지 않아도 노루의 몸이 잘 보였다. 손잡이를 잡고 힘주어 아래로 칼을 그었다. 그때 칼이 스친 몸통에서 뿌연 액체가 떨어졌다. 피보다 말갛고 냄새가 비리지 않은 액체였다. 가슴에서 흘러내린 액체의 정체를 알아채고 지오는 그만 칼을 내려놓았다.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미 잘려나간 가죽만 허겁지겁 지퍼 백에 담았다. 묵밭을 향해 달릴 때 느꼈던 거대한 불안이 다시 지오의 전신을 잠식했다.
*
잘 마무리했냐?
아저씨가 짐칸에 지퍼 백을 싣는 지오에게 물었다. 지퍼 백의 부피가 평소보다 작았다. 지오는 연구에 유효할 만큼의 가죽을 담아오지는 못했지만, 대신 목소리에다 조금 전에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노루였어요.
노루라는 말에 아저씨는 황급히 지퍼 백을 들춰 보았다.
노루는 쏘면 안 되잖아요. 어떡해요?
지오가 물었지만 밭에서처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왜 한 발만 쏘셨어요? 엉덩이 노리고 쐈잖아요. 전에 엉덩이를 쏠 때는 확실하게 두 발씩 쏜다고 했잖아요.
계속해서 쏘아붙이자 마침내 아저씨가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왜. 살아 있든?
지오는 가까스로 받아쳤다.
그건 아니고요.
그 알맹이 빠진 대화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아저씨의 신호를 받은 차군이 시동을 걸었고, 세 사람이 탄 차는 다시 어둡고 좁은 산촌의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켜진 곳까지는 또 삼십 여분을 그렇게 달려야 했다. 안개등을 켜고 민가 주변을 빠져나가는데 손전등을 든 농민들이 하나둘 도로변에 나타났다. 밭을 하나 건널 때마다 한 명씩, 조금 뒤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차 주변에 모여들었다. 지오는 목격자가 나타난 것 같은 노파심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수포로 덮어 둔 짐칸에는 반쪽짜리 노루의 가죽이 함께 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저씨가 창문에 머리를 내밀고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웬 총소린가 하고. 혹시 군청에서 나온 사람들인가?
차 앞을 막아선 노인이 짐칸을 슬쩍 보고 창문 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예, 비슷해요. 밭을 망치는 고라니가 있다고 해서.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리는 동안 사람들은 짐칸에 몰려들어 방수포를 만져댔다. 물컹한 지퍼 백을 만진 남자의 손에 피가 묻었고, 그것을 본 할머니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나온 것은 안도와 환호였다. 사람들은 흐뭇한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농사가 편해지겠다며 홀가분한 숨을 내뱉었다.
아저씨는 방수포를 다시 덮고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반대로 그림자가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한 사람만은 자동차 옆에 그대로 남아 아저씨를 주시했다.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는 아저씨가 뒷좌석 가까이 돌아왔을 때 다시 창밖에서 들렸다.
정말 고라니인가?
그럼요. 아무거나 막 잡으면 안 돼. 우리도 큰일 납니다.
아저씨가 대답했다.
저 위에 버려진 묵밭 옆에가 내가 농사를 짓는 콩밭인데, 거기 고라니만 내려오는 건 아니거든. 군청에다 잡아달라고 몇 번을 말하는데 왜 잡아주질 않어?
뭐가 내려오는데. 노루 같은 거요?
긍정의 의미인지 노인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오는 묵밭을 헤치고 나가느라 옷에 묻은 도깨비풀을 떼어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둘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차에서 노인을 조금 떨어뜨린 뒤에야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놈 방금 우리가 잡았어요. 노루라 엉덩이 가죽이 허옇잖아. 그러니까 그만 가세요. 어르신만 알고 계시고.
짐칸 앞을 어슬렁거리던 노인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한 마리 잡아주면 보통 군청에서는 얼마씩 쳐주나?
그런 건 왜요? 원래 노루는 진짜 안 되는 거예요. 고라니 꼬리나 가져가야 몇 만원 주는 거지.
내가 고마워서 그래. 이거 가지고 가.
노인은 주머니가 여럿 달린 조끼에서 구깃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아이, 이거 안 되는데.
아저씨는 노인을 데리고 차에서 몇 걸음 더 떨어졌다. 가 담뱃값이나 하라고 채근하는 노인의 목소리도 점차 멀어져갔다. 지오가 밭에서 느낀 불안이 다시 차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아저씨가 받은 돈 때문인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태도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차로 돌아온 아저씨는 농가의 히어로라도 된 마냥 의기양양했고, 그 모습을 보는 지오의 마음은 점점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갈밭에 흔들거리며 다음 지점으로 가면서, 지오는 다시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한테도 따로 돈을 받아요?
아저씨는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농사를 도와줘서 고맙다잖아.
그러니까 꼭 밀렵 같잖아요.
고라니도 군청에서 돈은 주잖아. 너도 김 박사한테 두당 열 개씩 챙겨 받는다면서?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래.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첫 번째로 잡히는 지폐를 꺼내 지오 앞으로 내밀었다. 돈을 끼운 둘째 셋째 손가락의 스냅이, 너도 수고했지 참,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오는 아저씨가 내민 손을 밀쳐냈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매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하자는 거야? 다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아저씨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돈을 주웠다. 지오는 놀라서 몸이 움찔했다. 헤어지기 전 시유가 했던 말을 아저씨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처음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간 날에 시유는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아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따져 물었었다.
너한테 나지 않던 냄새가 나.
시유는 지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부터 수술실 일 돕는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지?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지오는 제 속이 비칠까 봐 괜히 성을 냈다.
왜 한다고 했어?
뭐가?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알바 왜 맡은 거야. 예전처럼 그렇게 된 거야?
시유의 질문은 어느새 아르바이트를 넘어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팸 시절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툴 때면 시유가 한 번씩 꺼내는 레퍼토리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어김없이 형들을 따라 저질렀던 지오의 비행들이 나왔다. 비쩍 마른 노인들에게 빼앗은 돈으로 산 음식이 싫어서 시유는 아지트를 자주 떠나 있었다고 했다. 시유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왜 그런 짓들을 했어, 하는 흐름까지 가지 않으려면 지오는 자리를 피하거나 오히려 더 세게 나가야 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형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잖아. 또 왜 그러는데?
지오가 화를 내자 시유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오늘 뭐 시켰어?
그냥 연구 재료 때문에 칼 쓰는 거야. 아까도 말했잖아.
그랬지.
시유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고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너, 그럴 만하니까 그랬던 거잖아. 네가 감당할 만하니까. 그 말은 대화가 끊기고 나서 한참 뒤에 했다. 둘은 각자 휴대폰을 보다 샤워를 했고 같은 공간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 자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기에 지오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유가 집을 나간 건 그저 새로 하는 아르바이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시유가 했던 그 말을, 아저씨에게도 들었다. 말투는 완전히 달랐지만 내용은 같았다. 그 말은 그래도 될 때는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무방하니까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형님, 여기서 더 할까요?
형님, 하는 소리에 지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저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군은 또 다른 경작지 부근에 차를 세우고 서치라이트 전원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엔진 소리만 존재했던 차 안에 플라스틱 스위치 소리가 더해졌다. 차 유리를 통과해 허공을 밝히는 빛을 보면서 지오는 자신이 담당하는 업무 하나를 떠올렸다. 출근길에 본 영상에서 야산에 랜턴 조명을 켜놓고 노루를 사냥하던 남자가 외친 형님이, 혹시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혹시 저 말고도 같이 일하는 사람 있어요?
아저씨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있지.
그 사람, 돈을 주고 동영상도 찍어요?
룸미러로 뒷좌석을 쳐다보는 차군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저씨 역시 거울을 힐끗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지오를 보고 말했다.
왜. 한 번 찍어보려고? 해 봐. 요새는 휴대폰 카메라로도 잘 나와.
지오는 아저씨가 꺼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아르바이트도 카메라에 찍힌 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에서 구조센터의 수의사, 재활 관리사, 자원 활동가가 모두 모여 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갑자기 눈앞이 어질하면서 현기증이 났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들썩거리자 아저씨가 손을 뻗어 지오의 등에 얹었다. 그 손을 튕겨내듯이 몸을 일으켰다. 눈을 치켜뜨고 아저씨를 쳐다봤다. 아저씨 역시 갈 곳 잃은 손을 거두고 지오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저씨는 이웃들에게 해로운 짐승만 퇴치하는데 뭐가 문제냐면서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아저씨의 논리에도 맞는 구석이 있을지 몰랐다. 그에게는 이미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고 오전에 본 영상의 댓글도 분위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지오는 아저씨를 향해 날을 세웠다.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해로우면 사람도 쏘시겠어요.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쏴본 적 있으세요?
그냥 투정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하루를 보냈는데, 갑자기 시유와 똑같은 말을 꺼낸 아저씨에게 튀어나온 반항 같은 거였다.
어둠 속에서 정적이 흘렀다. 차 안은 차군이 서치라이트 스위치를 조작하는 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지오는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냐고 멱살을 잡거나, 내가 무슨 사람이라도 죽였느냐고 일갈하는 아저씨의 반응을 기다렸다. 평소 보여준 모습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저씨는 고함 대신 엽총을 치켜 올려 총구를 흔들었다. 총구가 지오를 향했다. 지오는 깜짝 놀라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을 더듬거리자 칼집에 꽂힌 칼이 만져졌고 지오는 반사적으로 그 생각을 해냈다는 사실에 훨씬 더 놀랐다. 바로 앞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압력이 가해졌다. 갑자기 멍해진 귀에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이명이 들려왔다. 지오는 뺨에 흐르는 물이 땀인지 피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혹시 있을 두 번째 총성을 피해 몸을 숙이고 밭을 향해 도망쳤다. 문득 안개가 심해 가시거리 확보가 어려울 거라는 일기 예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핸들링이 쉬워 살아남기 수월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스쳤다.
꼬리나 가지고 와!
기다렸던 일갈은 그때 나왔다. 아저씨가 소리친 방향에 지오가 있고 더 멀리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지오는 몸을 일으켜 곧장 그림자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지오는 눈을 감았다. 그림자의 꼬리를 자르려는데 차에서 소환되어버린 시유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시유가 그린 만화 속 돼지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당신을 안다. 괭이를 든 돼지의 대사가 시유의 목소리로 지오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다시 그림자의 꼬리를 잘랐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꼬리를 썰었다. 칼날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고 보았을 때 그것은 농작물의 줄기였고, 나무 부스러기였고, 난도질당한 흙과 뿌리와 썩은 잎사귀들이었다. 고개를 들자 정신없이 도망치는 그림자가 보였다. 뒤에서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아저씨의 서치라이트가 지오의 등을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이안리
1986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