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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그것을’ 말할 때-안희연론  

by  최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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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시대에서 시는 어떤 목소리로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 그 시대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감각이 남아 있다. 타의로 구획된 범주에 포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허무. 공고한 상징계로 편입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게 된 의미들은 자유롭다. 더이상 ‘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고, 일방적으로 규정된 상징의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폭력과 불합리를 향해 발화하는 ‘나’ 혹은 ‘우리’의 범주 역시 위태로워진다. ‘나’, ‘우리’라는 호명에는 쉽게 폭력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누가 감히 ‘나’와 ‘우리’를 규정할 수 있는가.

    시에서 ‘주체’의 자리를 선점하고 있던 비대한 자아가 떠난 뒤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고전적인 정의에서 서정시는 ‘세계의 자아화’로 설명된다. 시적 화자인 ‘나’의 눈에 비친 ‘세계(대상)’는 자아의 언어로 포획된다. ‘나’가 대상을 소환해내어 다듬고 깎아서 빚어낸 결과물이 서정시이다. 세계를 자아의 시선으로 포획하는 서정시의 공식은 ‘새로운 서정’의 등장으로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 단일한 의미 체계를 형성하는 주체 ‘나’는 사라지고, 파편적이고 복수적인 이미지들로 구성 중인 ‘나’가 남았다. 대상을 포획하는 대신, 그것을 절대 포획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 새로운 서정이 말하는 윤리인 듯 보였다. 그러나 폭력을 재현하려는 시인에게 자신이 도리어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발화가 향하는 에너지의 방향을 바꾼다. 어느새 중요해진 문제는 내가 ‘그것을’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비대한 자아를 피해 도망쳐 온 자리에서 다시 ‘나’라는 존재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여기 안희연이 있다. 안희연의 시에서 ‘나’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나’는 전통 서정시의 비대한 자아도 아니고, 새로운 서정의 소진된 주체도 아니다. 세월호 이후, 시인은 시대의 폭력이나 남겨진 불행을 ‘써야 하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맞닥뜨렸고 동시에 ‘쓸 수 없다’는 감각을 경험한다. 그러나 안희연은 ‘내가’ 그것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내가 ‘그것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소진된 주체가 대상을 포획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을 했다면, 안희연의 글쓰기에서는 대상을 포획할 수 ‘없다’는 무력한 고백이 터져 나온다. 주체의 자리를 반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상을 묘사하는 ‘나’가 전과 같지 않다고 증명하는 일 역시 여전히 ‘나’의 목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를 소진하는 일은 그 자체로 윤리적이라는 호칭을 획득할 수 없다. 스피박은 주권적 주체를 텅 빈 공간으로 만드는 담론이 자신의 권력을 은폐하려는 또 다른 주체를 비가시화한다고 지적했다.1) 주체가 더이상 권위적인 동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포획하는 주체의 자기반성은 다만 스스로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냄으로써 일종의 기만이 된다. 주체는 해체나 파편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또 다른 중심으로 작동한다.

    단지 이름을 바꾸고 돌아온 주체는 대상을 포획하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량에서 비롯된 대상 포획의 일시 정지에 불과하다. 거대한 재난과 불합리를 목격한 이후에 글쓰기를 수행하는 시인이 마주한 감각은 사뭇 다르다. 안희연에게 더이상 주체니 포획이니 하는 일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재현하려는 대상을 포획할 수도 없고, 자발적으로 포획하지 않을 수도 없다. 거대한 불가능성을 마주한 시인은 ‘나’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그것을’ 쓰는 일의 불가능성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과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 사이에서
    그는 내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주하라,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지금껏 수많은 지시어를 만나왔습니다 나에게는 예언의 새가 있고 언제나처럼 그것을 따라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검게 주저앉는 마을을 보면서부터 그때 나는 손 닿을 듯 가까운 언덕에서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방향에 있었습니다

    질문을 품었습니다 음악은 어디서 오는가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리란 애초에 삼켜질 운명을 지닌 것,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는 문장만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

    빌린 발을 신고 긴긴 잠에 들어도 내가 죽은 아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피아노는 흰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에 하루를 씁니다 끝까지 손을 흔드는 자세가 그림자의 표정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

    * 미셸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
    ─ 「피아노의 병」 부분

    시인의 언어는 연주되기를 기다리는 피아노의 건반과 같다. 연주자는 건반을 눌러 음을 내고 화음을 쌓아 멜로디를 만들어낼 것이다. 피아노 건반은 스스로 움직일 리 없고, 다만 연주자에 의해 움직여지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그렇다면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연주하라는 ‘그’의 지시는 타당하다. 연주자는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눌리지 않은 건반”으로 모든 연주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쉽게 건반을 누르지 못한다. “지금껏 수많은 지시어”를 만났을 때처럼 “언제나처럼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을, 자꾸만 망설인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피아노는 침묵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의 침묵은 윤리적이다. 수동적인 의미의 침묵과 달리,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2)는 정언은 기표의 망 사이로 빠져나가는 의미를 텅 빈 침묵 속에 담아낸다.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이 침묵을 선택한 것은 “언어만으로는 어떤 얼굴도 만질 수 없기 때문”(「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이다. 따라서 연주하지 못하는 연주자, 쓰지 못하는 시인은 침묵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아낸다.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건반을 앞에 둔 화자의 망설임은 “침묵으로 내내 말”(「페와」)하며, 그가 연주하는 행위가 곧 윤리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는 감각만이 극단의 윤리를 보장하는가? 상징계에 포획되기를 거부하고 바깥으로 탈주하는 방식은 언제나 세련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불합리나 폭력 앞에서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전시하는 대신, 그래도 써보겠다는 마음을 내어놓는 일은 한물간 서정 혹은 윤리로 읽히는가? 침묵 속에 머무르려는 시도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가? 안희연은 이런 물음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인용된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조금 다른 돌파구를 찾아낸다. “빌린 발을 신고 긴긴 잠에 들어도 내가 죽은 아이가 될 수는 없”다는 고백은 앞서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연주자는 더이상 모든 가능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며, 건반은 그의 의도대로 연주될 수 없다. 다만 그의 손이 모든 것을 연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에 하루를” 쓸 뿐이다. 이것은 세계를 포획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텅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안희연은 말할 수 없다는 선택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있는 힘껏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밀려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도망치는 것보다 지난한 일이다.
    나는 내가 한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 문득 손이 뜨겁다 손끝에서 이름이 돋아날 것 같다
    ─ 「하나 그리고 둘」 부분

    나는 나를 실감할 수 있어 질긴 밤의 자루를 끌며 벽돌을 주워 담는 일 / 팔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잘려나간 가지들에게 [……] 얼굴을 받쳤던 손의 무게만큼 나는 기울어질 수 있다 / 먼 이름과 뒤집힌 신발들이 뒤섞여 온다 / 검정이 투명을, 입술이 말을 끝끝내 감추더라도
    ─ 「손의 무게」 부분

    쓸 수 없다는 감각에도 그저 자리를 지키는 ‘나’는 쉽게 소진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희연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쓸 수 없다는 감각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나’가 감각하는 것은 쓰기의 불가능성 자체이다. ‘나’가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연주자는 또렷한 실체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내가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나를 실감할 수 있”는 ‘나’는 분열증적인 자기인식에 침잠하여 다시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지 않는다. 화자의 담백한 자기인식은 자아를 살찌우거나, 말려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문득 “손끝에서 이름이 돋아날 것 같”은 감각처럼 대상을 명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스며들지만, 그 순간도 온전히 주체의 의지가 낳은 결과는 아니다. 불현듯 뜨겁게 “돋아날 것 같”은 ‘이름’은 오히려 불가항력적으로 화자를 침범한다. 대상을 명명할 수 있는 ‘이름’은 쓸 수 없다는 감각 앞에서 도망가지 않은 시인에게 도래하려고 한다. 쓰기의 불가능성 앞에서 시인은 “질긴 밤의 자루를 끌며 벽돌을 주워 담는 일”로 지난한 시간을 견뎠다. 이제 저 멀리서 정말로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먼 이름과 뒤집힌 신발”은 “뒤섞여” 이곳으로 오고 있다.

    2

    안희연의 시에서 대상의 도래는 종종 화자를 침입하는 감각으로 묘사된다. ‘이름’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불가항력적으로 이름의 도래를 감지한다. 화자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화자를 향해 움직인다. 언제나 ‘내가’ 그것을 쓴다는 감각보다는, 내가 쓰려는 ‘그것’의 감각이 훨씬 강력하다.

    책을 열면 죽음이 쏟아진다 맨발로 맨몸으로 달려나오는 아이들
    나는 황급히 책을 덮고
    변명처럼 천장을 올려다본다 [……]

    눈을 감았다 떠도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도 않은 나무가 자랐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죽음들을
    더는 넣어둘 다락이 없어
    벽을 뚫고 자라나는 나무들을
    ─ 「월요일에 죽은 아이들」 부분

    “죽음이 쏟아”지는 책에서는 “맨발로 맨몸으로” 아이들이 달려 나온다. ‘나’는 느닷없는 침범에 놀라 “황급히 책을 덮”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영역에 침입한 ‘아이들’은 시의 후반부에서 맹렬하게 자라는 ‘나무들’로 연결된다. “심지도 않은 나무”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라났고, 나무를 키운 생명력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벽을 뚫고 자라나는 나무들”은 책에서 쏟아져 내리던 아이들을 닮았다. 다른 시편들에서도 ‘나’를 침범하는 대상들은 다양한 감각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파트너」)거나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는 나무”(「한그루의 나무를 그리는 법」)의 형상으로, “꿈속까지 칼이 들어”(「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오거나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페와」)는 감각으로 ‘나’를 침범한다. 그렇다면 ‘나’를 침입하는 대상들의 도래는 쓸 수 없음의 불가능성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안희연은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윤리적 발화의 공간 속에 ‘나’라는 존재가 커지는 순간을 경계한다. “나만 혼자 커다랗다는 부끄러움”(「소인국에서의 여름」)을 기억하게 만든다.

    끄룽텝*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때 눈앞에서 석류 한알이 떨어졌을까 [……]

    며칠째 굴뚝에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내몰린 마음의 끝에서
    제 그림자를 갉아먹는 거미와 눈 마주쳤을 때도

    나는 믿지 않았지 구원이라는 말 [……]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왜 자꾸 눈물이 차오르는지는 묻지 못한다

    돌 아니라 사람
    부품 아니라 사람
    그런 말들은 너무 작아서
    종이 인형 하나 쓰러뜨리지 못하는데

    왜 자꾸 날아오르려는 것일까 믿음이라는 말

    짓밟힌 눈빛은 나와 상관없다
    서늘하게 뻗어나가는 담쟁이덩굴은 나와 상관없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나의 하루가 일그러진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거미들
    후드득후드득 방 안으로 쏟아져내리는 석류 때문에

    * Krungthep: 천사의 도시.
    ─ 「거짓말을 하고 있어」 부분

    천사의 도시라고 하는 ‘끄룽텝’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추락했다. 그 소식을 들은 화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순간 화자의 “눈앞에서 석류 한알”이 떨어진다. 선명하게 연결된 비행기의 추락과 석류의 떨어짐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나’를 밀고 들어오던 ‘이름’들처럼,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건이 ‘나’를 침입한다. ‘나’와 상관 있/없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주관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신의 명령처럼 통보되며, ‘나’의 결정권은 지극히 무력하다. “며칠째 굴뚝에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소식”이나 “제 그림자를 갉아먹는 거미와 눈 마주쳤을 때”도 ‘나’는 그것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의지와 별개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뿐이다. “상관없다”는 자기암시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사건들 때문에 “나의 하루가 일그러진다”. ‘거미’가 출몰하고 ‘석류’가 쏟아져 내리는 ‘나’의 방은 손쓸 틈도 없이 함몰된다.
    그 사건이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은 곧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상관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 비행기가 추락하든, 굴뚝에 사람이 매달리든 그것은 ‘나’가 써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심 그것이 ‘나’와 상관있는 일이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나’가 결국 그것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돌 아니라 사람 / 부품 아니라 사람 / 그런 말들은 너무 작아서 / 종이 인형 하나 쓰러뜨리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차라리 그것이 상관없는 일이기를 바란 것이다. “말들은 너무 작아서” 무력하다. 나에게 도래하는 이름과 사건들을 도무지 잡아둘 수가 없다. 그러니 제발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를 바란다.

    나는 너를 화분에 심는다 너는 흐느적거리며 쓰러진다 / 제발 그대로 좀 앉아 있어
    ─ 「포르말린」 부분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 「시」 부분

    그는 길을 내려 했다 깎을 수 없는 것을 깎으면서 / 한 시간을 파묻으려 했다 사과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 그럴수록 그가 깎여간다 / 있지도 않은 사과를 손에 들고
    ─ 「죽은 개를 기르는 사람은」 부분

    사실은 건반 앞에서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래한 이름과 사건들은 결코 ‘나’에게 포획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커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시인은 또다시 ‘나’를 기어코 잠잠하게 한다. 대상을 언어로 잡아두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너를 화분에 심”지만 “너는 흐느적거리며 쓰러진다”. 대상을 잡아두려고 “제발 그대로 좀 앉아 있어”라며 빌지만, ‘나’의 언어는 그것을 붙잡을 힘이 없다.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리는 일뿐이다. 「죽은 개를 기르는 사람은」에서 대상의 포획 불가능성은 한층 더 나아가 아예 그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환상으로 드러난다. “깎을 수 없는 것을 깎”고자 한 시도는 “사과”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한다. “그럴수록 그가 깎여”나가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있지도 않은 사과”라는 사실이 대상을 포획하려는 시도를 신랄하게 비웃는다.

    대상을 언어화하려는 시도는 ‘나’의 기표로 그것을 가시화하려는 욕망에서 기인한다.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결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찌할 수 없는 이름들”(「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은 ‘나’가 시도하는 언어화의 무력함을 증명한다. 더 나아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나’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대상과 그것이 묘사되는 과정에 일종의 신성을 부여한다. 피아노 앞에서 불가능성을 마주한 화자에게 도래하는 듯 했던 쓰기의 가능성은 대상을 언어로 잡아두려는 욕망이 개입되려고 하자 곧바로 모습을 감춘다. “가까워지려는 의지만으로도 모과는 반드시 썩는다 / 당신이 모과 너머를 보기 시작할 때 모과는 이미 모과가 아니다”(「망중한」)라는 고백은 대상이 묘사되는 과정 전체가 결코 주체 ‘나’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처절한 깨달음이다.

    그러나 시인이 언어를 사용해 대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거짓말을 하고 있어」로 돌아가보자. 화자는 “그런 말들은 너무 작”지만 “믿음이라는 말”이 “자꾸 날아오르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런 말들”을 가지고 “종이 인형 하나”라도 쓰러뜨리려는 믿음이다. 대상이 도래하지 않던 순간에 불가능성을 마주했던 것과 달리, 대상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쓸 수 없다는 절망감은 이것이 ‘가짜’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 ‘진짜’가 있을 것이라는 감각으로 이어진다.

    3

    “결국 이 모든 게 믿음의 문제”(「트릭스터」)라는 생각은 지금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딘가에는 ‘진짜’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발현된다. 눈앞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곳의 가능성을 믿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시인은 순간 ‘나쁜 이상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좋은 이상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다면, 나쁜 이상주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다.3)

    눈앞의 모든 나무를 베어버리고 // 땅을 판다 / 진짜 나무를 심을 것이다 [……] 잠에서 깨어나면 새 나무를 갖게 될 거야 / 그 나무에선 아무도 울지 않는 시간이 열릴 거야
    ─ 「화산섬」 부분

    눈앞에 없는 새만이 진짜일 거라고 믿는 것 [……] 그녀는 오늘 낮에 읽은 점자책의 한 장면을 떠올린 다 / 새를 찾아 숲으로 간 아이들이 이미 새를 /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 「프랙탈」 부분

    “진짜 나무를 심을” 생각으로 눈앞에 있는 모든 나무를 베어버린다. ‘진짜’ 나무가 있다는 믿음은 순식간에 눈앞에 있는 존재를 ‘가짜’로 만든다. 가짜가 된 나무는 가차 없이 베어지고 “새 나무”에는 화자의 욕망이 투영된다. “아무도 울지 않는 시간”을 열매 맺을 수 있는 나무가 “진짜 나무”여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울고 있는 시간’으로 추정되는 현재는 화자가 부정하려는 ‘가짜’의 시간이다. “눈앞에 없는 새만이 진짜일 거라고 믿는” 믿음은 광적이다. 그 믿음은 화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접어놓은 페이지」) 믿음은 눈앞에 있는 ‘언덕’을 부정해야 도달할 수 있는 치열한 자기 부정이다. 그러나 자기 부정으로의 몰두가 잠시 흔들리는 순간, 눈앞의 현실이 들이닥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보다 보이는 것이 주는 실감은 실로 강력하다.

    시인은 문득 “새를 찾아 숲으로 간 아이들이 이미 새를 /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자신이 믿었던 ‘진짜’가 사실은 광적인 현실 부정에 다름이 아니었음을 체감한다. 현실의 풍경은 서늘하고 강력하게 화자를 실감시킨다. “쓰러진 물컵 속에는 물 외엔 아무것도 없다 / 슬픔이나 절망 같은 건 더더욱 없다”(「영혼 없이」)라는 직시는 보이지 않는 ‘진짜’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복한다. 물컵이 쓰러지면 남는 것은 흐르는 물이지, “슬픔이나 절망 같은” 것이 아니다. 화자가 바라던 ‘진짜’는 없거나, 오지 않거나, 혹은 이미 있다. 셋 중에 어느 쪽이든, 저 너머에 ‘진짜’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폐기되기 시작한다.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스페어」 전문

    ‘나’는 불현듯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진짜’라는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는 ‘단 하나’를 뺀 나머지를 모두 ‘가짜’로 만들어 버린다. 아직 보이지 않는 무엇을 ‘진짜’라고 믿는 태도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결핍으로 취급한다. ‘진짜’나 ‘가짜’의 판별은 ‘나’에 의해 수행된다는 점에서 대상보다 ‘나’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시인은 잠시 ‘진짜’에 대한 믿음으로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나’를 잠잠하게 만든다. ‘나’가 ‘진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식탁 위에 놓인 “싹이 난 감자 한봉지”이다. 대단할 것 없는 대상이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그 순간에 ‘나’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확함”은 ‘나’의 욕망과 무관하게 확실한 실체를 가지고 눈앞에 존재하는 대상의 성질이다. 기다리던 ‘진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소박한 ‘정확함’은 앞으로 도래할 무엇이 아니다. ‘나’의 기대에 맞춰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대상도 아니다.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린 것처럼, 대상은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는 깨달음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에 속한다. 그러자 문득 ‘나’는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을 사는 ‘나’는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라는 여분이다. 다시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안희연의 ‘나’는 여전히 비대하지도, 소진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라는 “몫이 그러하므로 어떻게든 계속”(「몫」) 갈 뿐이다.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 우리는 살아가야”(「굴뚝의 기분」)한다. 쓰기의 불가능성을 맞닥뜨렸을 때, ‘나’를 커다랗게 만들거나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입구”(「빛의 산」)를 찾는 것이 폭력을 말하고 남겨진 불행을 쓰는 안희연의 방식이다. 시인에게 ‘나’가 커다랗게 되거나 주저앉는 일은 모두 ‘나’를 위한 글쓰기로 수렴된다. 안희연은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과감하게 ‘나’의 문제를 건너뛴다. 주체의 안주나 탈주로 회귀하지 않고 남겨진 여분의 ‘나’로 침입하는 대상을 감각한다. 지독한 자기검열로 주체의 문제에 발이 묶이는 대신, 대상의 ‘정확함’을 응시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바로 안희연의 글쓰기이다. 시가 윤리를 말하려고 한다면, 때로 중요한 것은 말하는 ‘나’가 누군지보다 ‘나’가 말하려는 ‘그것’ 자체일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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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야트리 스피박, 태혜숙 역,「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그린비, 2013.

    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논리-철학 논고』, 책세상, 2006, 117쪽.

    3) “나쁜 이상주의자는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믿는 것은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되는 일입니다. [……] 한편, 좋은 이상주의자는 언어를 통해 야기된 분열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이 성취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르테가 이 가셋, 이재성 역, 「번역의 비참과 영광」, 『번역이론 : 드라이든에서 데리다까지의 논선』, 도서출판 동인, 2009, 152쪽.
    최선교

    최선교

    1996년생 대전 출생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졸업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석사과정 재학 중

  •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김영찬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비평이란 무엇이고 또 어떠해야 하는가. 그야말로 새삼스럽고 촌스러운 질문일 테다. 하지만 여전히 답하기 쉽지 않은 이 오래된 질문이 우리에겐 아직도 궁금한 미완의 숙제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비평에 대한 이런 상념들이 앞섰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비평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평은 텍스트를 선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현재 무엇이 의미 있는 텍스트인가를 분별해내고 그 텍스트를 분석해 그것이 놓인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가를 판정하고 헤아리는 안목. 대상에 대한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면서도 대상이 발화하는 목소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 그 결과를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소통의 기술. 새롭게 비평의 길에 들어서려는 예비 비평가들의 글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비평의 기본에 속하는 이런 덕목들이었다. 아쉽게도 비평적 거리 혹은 객관성이나 소통의 의지를 갖추지 않은 글들이 다수였고 의미 있는 비평적 질문을 품고 있는 글들도 보기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가 ‘그것을’ 말할 때-안희연론’은 많은 글들에서 보이는 그런 결함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텍스트에 밀착해서 ‘시’의 윤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비평적 분투가 눈에 보였고 자기 나름의 언어로 시를 풀어쓰는 유려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시인 안희연의 자리를 정확하게 배치하는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 아직은 서툴고 깊지 않고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도 채 여물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아직은 서툰 그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 최선교

    최선교

    1996년생 대전 출생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졸업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석사과정 재학 중

    안녕하세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선 소감이라는 것을 쓰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하지 않으실 글쓴이의 고백을 더해보겠습니다. 저는 항상 시가 무섭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말로 속닥거리는 그것들이 자주 무섭고 서러웠습니다. 시를 읽다가 넘어질 때면 메모지를 열어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를 썼습니다. 작년 4월 13일에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해독 불가능한 세계에 어쩌다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이쯤 되면 저의 고백을 이상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시가 무섭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말로 즐겁고 불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저를 조금이라도 끼워줄 생각이 있다면, 언제나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들을 변호할 뿐이라는 마음으로 쓰겠습니다.

    흔치 않은 이런 기회에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 이름들을 다 적는다면 주어진 분량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먼저 윤빈, 욧버 그리고 온유에게 나를 살려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최선교가 될 수 있었던 펜통, 갈 데 없던 그곳에서 서로를 알아본 살루스와 모교회 식구들은 구원이라는 말에 어울립니다.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오형엽 교수님과 함께 하는 대학원 동료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언니도 생각납니다. 저는 언제나 사랑과 우정을 먹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중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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