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말들의 사막

by  이윤훈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눈물이 사라진 곳 사막이 자라난다
    풍화된 말에 덮혀 잠귀 어두운 길
    눈을 뜬 붉은 점자들 혓바닥에 돋는다

    금모랫빛 말들이 줄을 이뤄 쌓인 언덕
    전갈이 잠행하는 미끄러운 행간 속에
    슬며시 꿈틀거리며 입을 벌린 구렁들

    눈물샘 깊은 데서 오래 맑힌 말들
    발걸음 자국마다 한 그루씩 심어놓아
    파릇한 수직의 빛들 방사림을 이루고

    신열 오른 말들이 아른대는 신기루 속
    물 냄새 맡은 낮달 사막을 건너간다
    어디서 선인장 피나 마른 입 속 뜨겁다
    이윤훈

    이윤훈

    1960년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하노이 KGS 국제학교 교사

  • 문정희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

    예심을 거쳐 11명의 작품이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원고들을 검토하며 우선 드는 생각은 다양성이 아쉽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작품들이지만 단정한 묘사와 소소한 토로가 주를 이루었다. 예년에 비해 표준형에 수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은 모험과 담론이 활성화되지 않는 시단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해 슬쩍 먼저 미안해지기도 했다. 최종 검토 대상이 된 3명의 작품을 추리는 동안 심사위원들은 언어 운용 전략의 부재, 리듬감 없는 수다, 절제의 부족, 사소함에 매몰되는 현상 등을 결격 사유로 열거할 수 있었다.

    「구조」외 5편은 시적 묘사의 특이성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태를 목전에 놓고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인상적인 묘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묘사가 구조를 이루는 데 도달하지는 못했다. 근사하게 그려보이는 능력은 사태를 전체적으로 헤아리는 사유 없이는 왕왕 심부름꾼의 성실함에 그치기 마련이다.

    「수변」외 5편은 우선 문장 단위에서 매력을 발하는 작품들이다. 문장의 힘과 이미지의 리듬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산문투의 진술에 대한 아쉬움, 절제가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조금 더 기다려봄직하다는 의견과 부합하여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여름의 돌」외 5편이 당선작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리듬감 때문이다. 과장이나 과잉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러운 리듬에 실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범상해보이나 드문 기량이다. 일종의 빼어난 ‘예사로움’에 달한 기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름의 돌」은 청년의 불안과 기대를 수일한 이미지와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해 순조롭게 표현하고 있어 당선에 값한다. 과감함이 숙제라면 숙제일 것인데 안정 없는 기획보다 신뢰할 만한 시적 진술이 올해의 선택이 된 것은 당선자에게 영광이자 도전이 될 것이다.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본심 진출작(11편)

    개는 빠르고, 나는 느린 편이다

    인터뷰

    육지 사람

    아스타 마냐나

    구조

    청첩

    빛나는 언덕과 스테인드 글라스

    농담

    꿈의 꿈치들

    전야제

    리스트
  • 이윤훈

    이윤훈

    1960년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하노이 KGS 국제학교 교사

    여느 때처럼 걷는다. 일터에서 집까지 한 시간 남짓 길을 구부리고 구름다리에 올라 먼 곳을 끌어들이며 휜 골목으로 기어들어 베트남 사람들 틈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쌀국수를 먹는다. 오늘 같이 바람이 찬 날에는 이만한 것도 없다. 한적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여느 때처럼 아무 일 없었던 양 차를 마신다. 양손을 연꽃잎처럼 옹그려 따끈한 머그잔을 감싼다. (온혈동물은 온기로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갑자기 가슴에 파문이 인다. 정오의 당선소식이 해거름에 다시 물고기처럼 불쑥 뛰어오른 것이다. 스무 해 전 시조가 처음 내게 왔을 때 시가 그랬듯 그 일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내 삶의 불가해한 비약이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후로 지금까지 헛발을 딛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먼 길을 왔다. 그러나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속되지 않는' 절제와 자유의 조화를 익히기까지 아직 멀다. 이제 시작이다.

    뭇 얼굴이 떠오른다. 늘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엄경희, 정수자, 염창권, 박현덕, 김유, 윤하 선생님, 독자를 자청한 이유경 작가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종종 안부를 물어오는 동창과 시벗들, 먼 길 떠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은 가족들, 모두 소중하게 다가온다. 설된 작품을 선뜻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손 모아 예를 표한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는 서설이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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