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

by  민가경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거기 있다가, 그 다음 사라진 것



    “Da, puis fort, exit.” 2)



    “거기 있다가, 그 다음 사라진다.” 이는 자크 데리다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용어에서 착안해낸 문장으로, 여기서 ‘da’와 ‘fort’는 어린 손녀가 실패를 던졌다가(“갔다fort”) 다시 당겨오는(“있다da”) 놀이를 표현하고 있다. 즉 보호자가 외출했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부재 상황을 극복하는 어린 아이의 과정이 실패를 던지고(fort) 당겨오는(da)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어린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거기 있다가 그 다음 사라진” 것들 사이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삶이 마냥 극복만 담보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삶은 회수하는 ‘da’의 과정에서 실패하여 극복할 길을 영영 잃고, 어떤 삶은 던져버리는 ‘fort’의 행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여 나아갈 방법을 영영 잃기도 한다. 2014년 봄과 2022년 가을, 우리가 겪은 죽음의 사태와 정동으로서의 슬픔은 개인 또는 국가 단위를 특정하지 않고 일어났고, 또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상실과 애도의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fort’도 ‘da’도 할 수 없는 ― 즉 마냥 갈 수도 마냥 머무를 수도 없고, 또 마냥 밝을 수도 마냥 어두울 수도 없는 ― 모종의 회색지대에 위치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리비도 회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문단은 스스로의 위치를 회색지대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fort’도, ‘da’도 잠시 보류한 채 자기 정립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유보 자체가 문학의 애도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또 지난한 양극화의 투쟁과 ‘찬’도 ‘반’도 할 수 없는 비체제에서, 양극을 지양하고 무채색이기를 선택해버리는 것은 문학이 세상의 모순과 역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 무채색의 지대를 빠져나와 눈이 아리도록 강렬하고 순수한 빨강의 색채를 제시해내는 작가를, 그리고 “모든 감각적, 정서적 감응(affection)의 뿌리는 사랑”3)임을 온 몸으로 증명해내는 작가를, 우리는 만났다. 과연 당대에서 이유리만큼 사랑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사랑을 논하는 것은 그 다양성과 색채를 논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돌고 돌아, 결국엔 다시 사랑’이라는 이유리의 명제를 논하는 것은 우리의 “거기 있다가 그 다음 사라진 것”들에 대해 가장 정확히 이야기하는 방법일 것이다.

    소설 속 직접 언급이 금기된 텍스트로서의 사랑을 핀셋으로 끄집어내어 정확히 던져주는 일이 과연 평론 아니던가. 어디에? 세상에, 내 옆 사람에게, 우리가 두고 온 것들에, 그리고 “거기 있다가 그 다음 사라진 것”들에.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잠시 잊고 있었던 낭만과 순수가, 채도 높은 정열과 상상이 다시금 도래한다.



    2. “빨간” 생명, 애도로 완성하는 사랑



    ‘동일한’ 상실을 ‘동일한’ 방식으로 안고 있는 ‘동일한’ 사람을 만나 ‘동일한’ 사랑에 빠져버리는 참으로 뻔한 사랑 이야기가 있으니, 단편 「빨간 열매」가 그것이다. 소설은 작중 ‘아버지’를 이미 상실하고 시작된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결코 무겁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죽은 ‘아버지’가 나무로 환생하기 때문이 아니다. 작가가 ‘아버지’를 그의 주체적 의지와 무관하게 나무로 변형한 까닭은 은유적 개념화를 비껴가고 모종의 환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엔트로피의 자유를 허용하기 위함이다. 이 이야기가 진정 색을 얻고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지점은 ‘아버지’의 환생에 있지 않고,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 사람”(p9)처럼 애도를 수행하는 ‘나’의 빨갛고 가뿐한 마음에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가 거기에 머물러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은 데리다가 제시한 애도의 원형이다. 즉 애도를 위해서는 “그에게 남은 것 안에,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것”4)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상실 이후의 애도작업은 ‘누가’ ‘어디에’ 묻힌 것인지 일절의 혼동과 의심없이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빨간 열매」는 뻔한 이야기로 머무르지 않고, 애도의 관건을 성실히 수행해내는 ‘나’의 뻔하지 않은 사랑의 일대기로 승화된다.

    ‘나’가 병상에서 떠난 ‘아버지’로부터 받은 마지막 부탁은 자신의 “남은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p9)는 것이었다. 그와의 오랜 시간으로 인해 이행의 관성이 붙은 ‘나’는 그의 유골을 화분에 담고 그곳에 나무를 심는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나무는 화분에 함께 묻힌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을 건다. “물”(p15)

    그렇게 나무로 환생한 ‘아버지’를 수레에 태우고 나간 야외의 공원에서 ‘나’와 ‘아버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데, 그것은 ‘P’와 화분 형태인 ‘P의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공통점을 지닌 ‘나’와 ‘P’, 그리고 ‘아버지’와 ‘P의 어머니’는 교류하며 서로를 닮아가고, ‘나’와 ‘P’가 연인이 되었듯 ‘아버지’와 ‘P의 어머니’ 역시 연인이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버지’와 ‘P의 어머니’ 사이에 “빨갛고 작은 열매”가 태어난다. 그들의 빨간 열매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나’와 ‘P’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 그냥 반으로 나눠서 먹어버리자.”(p31)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나눠 먹어버린 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꾼다. 그것은 “영업이 끝난 놀이동산처럼 보이는 곳을 뛰어다니며 끝없이 끝없이 굴러가는 빨간 공을 쫓아다니는 꿈”(p32)이었고, ‘나’와 ‘P’는 그것이 태몽임을 직감한다.

    이 단편은 크게 두 관계성을 축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와 ‘P’의 관계이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관계이다.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가 사람의 모양일 때나 나무의 모양일 때나 말싸움을 하고, 서로에게 빚진 기억들을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 원하는 것을 얻어내며, 이따금씩 “저거, 확 베어버릴까”(p19) 싶을 정도로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을 초월한 그것은 사실상 사랑의 감각과 진배없다. 이들 관계의 핵심은 그들이 서로를 생(生)으로 머무르게 한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 최초의 생명을 부여했던 ‘아버지’는 다시 ‘나’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아 나무로 거듭 태어나고, 그 나무에서 태어난 빨간 열매는 다시 ‘나’에게 잉태된 또 다른 ‘생명’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거듭해서 생명을 부여하고 그 숨을 존속시키는 관계로 그들은 연결되고 있다.

    특히, ‘나’는 ‘아버지’란 대상을 죽음의 세계로 떠밀지 않고 ‘살아있는 나무’로 만들어 내면의 비밀 묘지로 들인다. ‘나’는 ‘아버지’의 유골 조각 중 “가장 커다란 조각을 집어 도록도록 굴리다가 빛에 비춰 보기도 하고 이 뼈는 ‘아버지’의 어디였을까 생각해보기도”(p14~15)하며, 그를 또 다른 생명에 활착시키기 위한 내재화의 시간을 갖는다. 내 안으로 애도의 대상을 들인다는 것은 그를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전유하려는 욕망을 억제한 채 그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묻힌 화분에서 새로 태어난 ‘나무’를 받아들이는 작업은 타자로서의 ‘아버지’를 인정하기 위한 과정이며, 그러한 애도의 방식만이 자신을 구원할 사랑의 묘기임을, ‘나’는 잘 안다.

    물론 애도의 계기는 반드시 타인의 ‘죽음’에서 비롯한 상실로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는 생의 어떤 주기를 마감했거나 자신의 일부와 작별한 인물들로 하여금 그들 내면의 묘지에 과거를 안장하는 방식으로 애도를 수행시키곤 한다. 이를테면 처참한 사업의 실패 앞에서도 지난날 노고를 스스로 인정하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p168)다며 자신의 의지와 성공을 별개의 사건으로 내재화하는 「왜가리 클럽」의 ‘양미’가 그러하다. 작가는 ‘양미’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p171)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복싱을 위해 천성에 없는 “미움을 억지로 만들어”(p97)내느라 손이 브로콜리로 곪아버렸을 때, 「브로콜리 펀치」 속 ‘원준’은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제 자아 ― 남을 미워할 수 없는 ‘나’ ― 간 타자성을 인정하고, 자신 안에 그 괴리를 매장한다. 작가는 그 때 비로소 꽃망울로 피어나는 ‘원준’의 손을 보여주며, 상실은 “결별이 시작되는 지점”이 아니라 “상실 대상에 대한 책임 ― ‘나’만이 망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하며 그와 다시금 연결되는 일 ― 이 탄생하는 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죽음은 프로이트가 말한 ‘타자를 떠나보내는 망각의 출발점’으로, 상실 대상과의 관계를 ‘종결’하는 것을 정상적 애도로 간주하지만, 세상에는 데리다가 제시한 “타자와 사는 기억의 출발점”5)으로서의 죽음도 있다. 마치 이유리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상실 대상과의 관계가 비로소 ‘시작’되는 데리다 식의 애도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데리다의 관점에서 잘 완성된 애도는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와 ‘P’의 관계를 통해 잘 드러난다. ‘P’는 이미 ‘나’와 동일한 상실과 애도를 소화한 인물이다. 즉 ‘나’와 동일시된 ‘P’는 ‘나’의 새로운 대상 리비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만난 공원에서 대뜸 사람의 말로 인사를 건네는 나무에 대해 ‘나’는 그 나무가 내 아버지임을 차마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미 ‘나’와 동일한 형태로 어머니를 지니며 살고 있는 ‘P’는 다 이해한다는 듯 ‘나’에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나’ 역시 군데군데 상처가 묻어있는 그의 집 ― “깨끗하게 닦이지 않은 방구석”, “손자국이 난 유리창”, “긁힌 자국이 있는 장판”(p24) ― 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다. 그의 상흔에 나의 것을 대입할 수 있으며, “타자와 사는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P’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사랑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아버지’에게 향해 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그것을 견디고 건전하게 회수해낼 때, 그리고 그것을 ‘전유’하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상에게 부착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붉은 조명과 높은 채도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필연적으로 혈압과 맥박이 증가하는 빨강과 그것을 닮은 사랑을, 우리는 하게 된다. 에너지, 열정, 욕망, 유혹, 정력, 정열, 불, 피, 섹스, 행복, 환희, 흥분, 감정, 기쁨, 그리고 생명.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빨간 사랑’을.

    ‘빨간’ 파프리카와 다른 색 파프리카의 차이를 묻는 ‘아버지’, ‘빨간’ 땡땡이 수영복을 입고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나’, 사랑에 빠진 ‘P의 어머니’, 그녀의 새 잎 가장자리와 그 ‘발그스르함’, 태어난 ‘빨간’ 열매, 그것의 ‘빨간’ 과육과 살점, 그리고 꿈속에서 ‘나’가 쫓던 ‘빨간’ 공까지, 서사와 인물들을 관통하는 강렬한 빨간색의 향연이 우리 앞에 드러난다. 회색지대에 갑작스레 돌출된 붉은 사랑의 색채는 눈이 멎을 듯 이토록 강렬하다.



    3. “빨간” 경고등 앞, 망각으로 완성되는 사랑



    그러나 「빨간 열매」 속 관능적 빨강과 달리, 단편 「둥둥」의 빨강은 금지와 위험의 색으로 소설 도입부터 우리를 긴장시킨다. 때때로 빨간색은 ‘적신호’나, ‘통행금지’, ‘경계등’ 표지처럼 우리로 하여금 위험을 감지하게 하는 색이 아니었던가.

    「둥둥」은 주인공 ‘은탁’이 서해 바다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상황을 소묘하며 시작한다. 그녀는 지금 ‘형규’에게 선물하기 위한 빨간 명품 캐리어백을 붙잡은 채 구조를 기다리며 겨우 버티고 있고, 그 캐리어 안에는 공연을 앞둔 그가 기다리고 있을 대마초 머핀들이 들어있다.

    ‘은탁’은 연예인 지망생 ‘형규’를 처음 만난 날, “내 남은 평생은 오로지 이 아이를 위해 바쳐지게 되리라는 것을”(p42) 직감하고,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아온 사랑방식 ― 즉 “넘치도록 돈을 주는”(p44) 방식 ― 을 그에게 투사한다. 차를 팔아 대포카메라를 사고, 콘서트홀을 빌려 단독 무대에 세우고, 때마다 고가의 선물을 하는 것6)으론 모자라서, PD인 친척까지 동원해 ‘형규’를 기어이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성공한 ‘형규’가 어느 순간부터 대마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을 알면서도 “그걸 끊도록 적극적으로 돕지”(p54)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제공하는 공범이 된다. 상황이 줄곧 전개되어 바다에 떠다니게 된 ‘은탁’은 마약 머핀을 지닌 자신의 구조(生)가 곧 ‘형규’의 사회적 죽음(死)으로 연결될 것을 알기에 캐리어를 바다 깊이 빠트리고 죽어간다.

    그러나 ‘은탁’은 “이타심이 생존 본능을 이기는 순간”(p65)을 연구하던 외계인에 의해 포착되고, 자신의 삶을 스캔하는 조건으로 소원을 하나 제시하며 되살아난다. 그녀가 다시 돌아가기로 선택한 시점은 ‘형규’를 처음 만났던 그 여름날이다. ‘형규’를 만났던 최초의 시간이 오기 전, 서둘러 졸업 작품 재료를 사러 가는 ― 즉 ‘형규’와 엇갈리기 위해 일찍이 몸을 움직이는 ― ‘은탁’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그녀가 외계인에게 제시했던 소원을 암시하며 소설을 끝맺는다.

    이유리의 소설에 무려 외계인이 나와 버린 이상, 우리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모든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욕구(appetitus)라는 자연적 형태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 타 생명체의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지점은, 그것이 자연적 미각을 뛰어넘어 이성적 사유를 통해 자신과 타인에게 더 나은 것7),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선(善)을 도입하고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그 지점은 소설 속 외계인의 입을 빌려서도 한 번 더 설명된다.



    “아까 지구인을 하등 동족이라고 하셨지만,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지구인이 우리보다 훨씬 고등하기도 해요. 우리 별에는 이타심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조차 없거든요.”(p63~64)



    인간적 행위로서의 사랑에는 감각적 기쁨도 필요하나 자신의 이익(善)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며, 그것은 에티엔느 질송8)이 말한 ‘포도주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구분되는 지점으로 설명을 대체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사랑은 나에게 어떤 善(이익·유희)을 주는 대상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의 善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외계인은 ‘형규’를 향한 ‘은탁’의 이타심에서 특이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하는 사실이 있다. ‘형규’를 향한 ‘은탁’의 사랑이 어떤 이성적 호의, 즉 ‘에로스’를 초월한 것이라 해서, 그것이 ‘형규’의 善이 지속되길 바라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 혹은 ‘아가페’의 모양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발견한 ‘은탁’의 사랑은 사실 ‘은탁’ 그 자신을 향한 사랑이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자신의 善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하면서, 상대의 진정한 善을 추구하고 있다고 아주 자주 착각9)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탁’이 줄곧 끔찍하게 여겨온 자신의 성씨를 ‘형규’가 같은 성씨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게 된 대목에서 드러난다. ‘형규’가 없었다면 그대로 유학을 떠나 화가가 됐을테지만, 그것은 끝끝내 자신의 이름 석 자조차 사랑할 수 없는 삶이었으므로 ‘은탁’은 ‘형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즉 ‘목은탁이 목은탁을 줄곧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은탁’이 ‘형규’에게 기대했던 善이며, ‘형규’를 향한 사랑은 그 외피와 무관하게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그것을 내가 좋아한다’는 알맹이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나를 전부 해체해서 그 조각 하나하나를 잘 닦고 손질해 다시 사람을 만든다면 그게 바로 형규”(p45)가 된다는 ‘은탁’의 말 역시 그 진술에 다름 아니다. 그 때 ‘형규’에 대한 ‘은탁’의 사랑은 ‘포도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라는 은유로 전환된다.

    그리고 ‘은탁’은 죽음의 순간, 이 사랑이 결국 ‘형규’에게도 자신에게도 선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의식이 흐려지는 ‘은탁’ 앞에 점멸중인 교각의 ‘빨간’ 불빛이 그것을 경고했기 때문이다. “목형규의 색깔”인 “새빨간 팔십오 리터짜리 캐리어”(p36)는 더 이상 ‘은탁’의 부표나 구명 튜브가 될 수 없다. 빨강은 더 이상 ‘은탁’에게 리비도 아닌 죽음의 색이며, 여기서 더 가지 말라고 위험을 알리는 신호의 색으로 작용한다. 이 때 머나먼 교각의 점멸등은 “빨간색이었다가 은근슬쩍 분홍색으로 바뀌고 또 초록색이 되었다 노란색”, 그리고 “다시 빨간색”(p35)으로 돌아온다. 불빛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틀림없이 빨간색으로 되돌아”(p36)가는 과정에서 ‘은탁’은 자신이 돌아갈 곳이 결국 ‘은탁’ 그 자신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 사랑은 ‘은탁’에서 비롯해 줄곧 ‘은탁’에게로 향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사랑을 더 진행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비로소 망각의 개입이 필요해진다. 앞서 「빨간 열매」 속 ‘나’의 애도는 “타자와 사는 기억의 출발점”으로서의 죽음 ― 데리다의 정의 ― 에서 차용했지만, 「둥둥」 속 ‘은탁’의 자신을 향한 애도는 “타자를 떠나보내는 망각의 출발점”으로서의 죽음 ― 다시 프로이트의 정의 ― 을 차용한다. 애도를 위해서는 그 대상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하며, 그것과 내가 함께 살 수 없다면 ‘망각’해야 한다.



    “사랑은 언제나 여름비처럼 나나나 나나 나. 사랑은 곧, 나나나 나나 나나나나.”(p40)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며 ‘은탁’이 외롭게 부르던 ‘형규’의 노래 속 가사는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善의 외피를 뒤집어 쓴 ‘사랑’은 결국 돌고 돌아오는 계절과 여름비처럼, 곧 나나나 나나 나나나나, 그렇게 ‘나’에게 돌아온다. 모든 사랑의 기원이었던 ‘나’는 ‘나’에게 돌아와야 하며, 그 귀갓길을 영영 잃지 않기 위해 ‘망각’은 유일무이한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은탁’은 결국 ‘망각’을 통해 ‘형규’ 이전의 자신으로 회귀하며 그 사랑을 완성한다.

    ‘망각’이라는 구원은 「손톱 그림자」와 「평평한 세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손톱 그림자」의 주인공 ‘수정’은 사고로 죽은 과거의 애인 ‘용준’의 죽음에 결정적 실수를 보탰던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타자로 분리하고 기어이 망각한다. ‘수정’을 망각하지 못한 ‘용준’만이 이미 죽었어도 아직 죽지 못한 것과, ‘용준’과 가기로 했던 몰디브를 신혼여행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전혀 생각하지 않”(p134)던 ‘수정’의 모습은 유비를 이룬다. 용준은 마치 『햄릿』에서 유령으로 등장하는 햄릿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실제적(생물학적) 죽음’은 청산했을지 몰라도 ‘상징적 죽음’으로서의 망각이란 빚은 청산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부채를 상환할 때까지 왜 손톱 모양의 유령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대답이다10). 반면 ‘수정’은 ‘용준’의 부재를 회수하는 ‘da’의 과정에서 유일한 구원으로 ‘망각’을 선택했으며, 어쩌면 ‘용준’과의 사랑의 모판이었을 자신, 그 모든 근간이었을 자신에 대한 사랑을 돌고 돌아 완성한 것이다.

    또한 「평평한 세계」 속 ‘고미’와 ‘새어머니’ 역시 신체가 반투명해지며,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 ― 생물학적 죽음 ― 를 맞지만, 서로를 기억하는 그녀들은 “양쪽 모두를 한꺼번에 보”(p234)는 평평한 세계에서 “둥글납작하게, 고요하고 반반한 모양으로”(p241~242) 마냥 머무르게 된다.



    4. 지금, 여기, 회색지대 위 우리가 덧칠할 “빨강”



    다시 「빨간 열매」로 돌아가 본다. ‘나’가 번역한 『사과』라는 작품에는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사과라고 믿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과일주스를 짜내는 거리의 노점을 보고 충격으로 기절하여 실려 가고, 깨어나서는 “반으로 짝 갈라진 채 병원 침대 두 개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몸이 갈라진 수치보다 자신의 “의도와 의식과 의지가 대체 이쪽 조각에 있는 것인지 저쪽 조각에 있는 것인지”(p17) 구분할 길이 없어진 것에 극도의 혼란을 느끼고, 이내 죽어버린다. 소설의 ‘나’는 그것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며 비웃고 넘기지만, 현실의 우리는 자신을 사과라고 믿는 여인이 느꼈을 까마득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 모두가 경험한 공통의 상실을 환기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2014년 이후, 우리는 경건의 백(百)에 머물러야 할지 침잠의 흑(黑)에 머물러야 할지 혼란했고, 우리 대신 우리를 정의하는 것들 사이에서, 또 양보와 양해를 종용하는 곳에서 “의도와 의식과 의지”를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막막했다. 애도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참여는 그 시점에서 폭발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분노, 죄의식, 슬픔과 무력감만을 포효해온 동안, 문학의 또 다른 기능마저 무채색으로 덧칠돼왔다. 특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스크라는 항복의 백기가 우리의 입을 덮고, 사람과 사람이 빚어내는 형형색색을 거리두기로 차단당한 동안, 모노톤의 세계는 모두에게 으레 익숙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문학이 지닌 ‘색채’ 고유의 힘을 스스로 의심한 것 아닌지, ‘fort’는 해냈지만 ‘da’는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여기, 회색지대 속 무채색의 사랑도 필요하지만, 이따금씩은 우리에게도 ‘빨강’의 그것이, ‘노랑’과 ‘파랑’의 그것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며, 그 색채가 더 옅어지기 전에 온 몸으로 감각해내야 한다. 선명한 채도로도 애도를 말할 수 있는 우리 본연의 힘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의심이 될 때는 다시 지젝의 농담11)을 생각해보자. 자신을 옥수수라 철석같이 믿어온 남자가 오랜 치료를 통해 자신이 인간임을 겨우 납득했어도, 닭이 쫓아오자 ‘나야 내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지 않냐’며 두려워하던 모습이 사실 우리의 모습 아닐는지.

    우리는 적어도 이유리의 소설 안에서만큼은 자신을 ‘사과’라 믿는 여자와 자신을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느꼈을 혼란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녀의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우리 모두 깨닫기 때문이다. “의도와 의식과 의지” 모두 이쪽 조각에도 있고 저쪽 조각에도 있으며, 이런 나에게도 있고 저런 나에게도 있음을. 반드시 내가 생각하는 것 속에만 모든 게 존재하지 아니함을 말이다. 우리가 진실로 문학하는 행위만이 우리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우리의 찢긴 몸, 눈물과 그 모든 내밀한 애도는 손상되지 않은 채 독자에게 충분히 전이되고 위임될 수 있다. 우리를 구현하는 독자가 우리 대신 울어주고 있을 것이며, 슬퍼하는 우리의 책무를 덜어주고 있을 것이다.

    “빨간 파프리카랑 노란 파프리카의 차이가 뭐냐”고 묻던 「빨간 열매」 속 ‘아버지’의 말을 빌려 누군가 문단에 “빨간 사랑과 노란 사랑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우리는 굳이 소설 속 ‘나’가 했던 대답처럼 “빨간색은 골다공증에 좋고 노란색은 고혈압에 좋다”(p11)고 구분지어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빨간색도 사랑에 좋고, 노란색도 사랑에 좋아요.”

    우리가 돌고 돌아 이토록 뻔한 사랑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이유로 시작되었고, 사랑이라는 이유로 종결되었으며, 끝끝내 우리가 당도할 곳도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리가 창조해낸 인물들이 주저하는 우리의 손을 잡아끌며 채근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그냥 이 사랑을 먹어버리자”고.









    1) 본고에서는 이유리의 단편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2021)를 다룬다. 본문 인용시 해당 쪽수만 밝혀 쓴다.

    2) “거기 있다가, 그 다음 사라진다.”,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그린비, 2007, 22쪽

    3) Thomae Aquinatis, Summa Theologica (이하, ST), (Parisiis: Petit-Montrouge, 1841) I-II, q.62, a.2, ad3.; 이명곤, 「토마스 아퀴나스, 완전한 사랑은 가능한가?」, 『신학과 철학』 제13호,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쪽에서 재인용.

    4) 원문은 “il faut (savoir - s'assurer) que, dans ce qui reste de lui, il y reste.”이며, “그에게 남은 것 안에 그가 거기에 남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확실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로 옮길 수 있다. -자크 데리다, 위의 책, 32쪽.

    5) 김주현, 「상실, 애도, 기억의 예술-낸 골딘의 사진」, 『철학논총』 Vol.86 No 4, 새한철학회, 2016, 91쪽.

    6) ‘은탁’은 자신을 위해 지었다는 ‘형규’의 노래가 사실은 명품을 갖기 위한 지독한 설계 ― 이를테면, “LOVE에서 OE를 빼면 랄랄라 그건 바로 L과 V. 오이는 씁쓸하고 맛없어, 누나 사랑에서 오이를 빼주세요”(p49)같은 노골적 가사 ― 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에게 기꺼이 LV(루이비통) 가방을 사준다.

    7) 이명곤, 위의 글, 2쪽.

    8) “나는 포도주가 나에게 주는 즐거움 때문에 포도주를 사랑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을 나에게 주는 즐거움 때문에 사랑한다면 내가 그의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사물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구별되어야 한다.” -E.Gilson, Le Thomisme(Paris: J. Vrin, 1942), p.376, 이명곤, 위의 글, 3쪽에서 재인용.

    9) “이러한 조건 하에서 사람들은 실제적인 선(진정한 선)을 원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선한 것을 원하는 가?라고 물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가끔 이 둘 사이에는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역, 이제이북스, 2006, 21~23쪽

    10) 이는 근본적으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보고된 바 있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계속 살아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프로이트의 꿈속에서 아버지는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있으며, 어떤 점에서 모든 이는 두 번 죽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망자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는 죽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며, memento mori라는 문장은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라는 뜻으로 읽혀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새물결, 2013, 217~219쪽.

    11) 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 73~75쪽
    민가경

    민가경

    1994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김영찬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적지 않은 응모작 가운데 최종적으로 거론된 것은 다음의 작품들이다. ‘‘나’는 이미 (당신)을 알고 있을 것이다-유계영의 시’는 유려하고 차분한 문장으로 유계영의 시에 나타나는 ‘나’에 관한 사유를 ‘새로움’이라는 화두와 연결하는 솜씨가 돋보였다. 지나치게 텍스트에 밀착한 나머지 객관적 거리 확보에 실패한 다수의 시 비평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다소 밋밋한 전개가 아쉬웠다. ‘내가 당신에게 진실할 때 가능해지는 일-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의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2021·문학동네)에 드러나는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주체의 문제를 곡진하게 풀어냈다. 진심이 깃든 문장과 간결한 논지 전개가 오랜 습작의 내공을 보여주었다. 끝까지 당선작과 경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익숙한 주제라는 지적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올해의 당선작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은 이유리의 단편에 나타나는 ‘빨강’이라는 색채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모든 감각적 정서적 감응의 뿌리는 사랑’임을 역설하는 중요한 징후를 포착해낸다. 때로 감정적 절제가 아쉬울 정도로 분석 텍스트에 대한 감응력의 밀도를 자랑하는 문장들이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점은 오히려 최근 비평에서 찾아보기 힘든 활기와 열정의 배후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문학평론은 자신만의 문장, 자신만의 독법으로 해당 텍스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매혹의 지점을 다시 한번 되짚어주는 작업이 아닐까. 올해의 당선작은 너무 당연해서 오랫동안 간과해왔던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었다. 획일화된 독법이야말로 문학 혹은 문학평론의 반대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자신만의 자유를 앞으로의 글쓰기를 통해 당당히 누려가길 바란다. 당선을 축하한다.


  • 민가경

    민가경

    1994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세상에서 독후감 숙제를 제일 싫어하던 아이가 자라 오늘날 제가 된 경과를 곱씹어보면, 문학이 결국 제 29년을 숙주삼아 자신의 효용을 증명했구나 싶습니다.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한 직장에서 76번의 월급을 받는 동안 미련의 더께가 내려앉아 비대해진 책장을 보고 있으면, 문학이란 유령이 불쑥 틈입해와 ‘지금 뭐하고 있냐’는 말로 저를 치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다만 어떻든 간에 지금의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저를 죽지 않고 살게 만듭니다.

    이승하 교수님을 비롯한 중앙대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특히, 난데없이 문학 판에 뛰어든 제자에게 평론의 기능을 알려주신 정은경 교수님. 문학의 구원이 있을 지어다, 말씀하셨죠. 사실 그 땐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주신 가르침과 용기를 잊지 않고 계속 쓰겠습니다.

    미숙한 글이지만 그 가능성을 믿고 길을 열어주신 신수정, 김영찬 심사위원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기회를 제 어깨에 지워주신 책임으로 여기려합니다. 혐오하고 담쌓는 일에 언어와 활자를 쓰는 이 부박한 시대에, 문학과 평론의 역할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고투하며 써 나가겠습니다. 낙관을 배제하고 희망을 말하는 평론가가 되겠습니다.

    내가 호명하지 않아도 호명되고 있음을 알 모든 당신께 고맙습니다. 특히 나의 한 때를 티끌 없는 마음으로 함께 해준, 지나간 당신, 많이 고마웠습니다. 신춘당선의 영광은 내게 생명을 준 어머니 이금섬 씨, 아버지 민병용 씨와 하늘에서 보고 있을 이모 희숙 씨께 올립니다. 내가 사랑해온 것들은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주는 것들이었습니다. 파도로 일렁일 마음을 견디며 그 아름다움을, 하물며 엉망진창까지도 모두 끌어안겠노라는, 그런 싱거운 말을 해봅니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